이곳에 살면서 혼자 영국에 온 사람들, 공부하러 온 사람들, 가족 전체가 이민을 온 사람들 등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게 된다.
이민자들이라는 게 크게 보면 비슷하게 공유하는 공통가치가 있긴 하지만 혈혈단신 혼자 아는 사람 없이 온 경우와,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전체가 이민을 온 경우는 경험이 또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혼자가 된다는 건 굉장히 자유롭지만 그만큼 인생의 대소사를 혼자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책임도 오로지 혼자 져야 한다. 오지랖과 꼰대질이 없는 대신 내 선택에 대해 조언해주거나 격려해주는 사람도 없다.
한국에서 영국에 오겠다고 마음먹기까지, 35kg 캐리어를 들고 영국에 홀로 도착하기까지, 집 계약부터 첫 직장을 구하고 이직에 성공하기까지 나 또한 크고 작은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많은 결정을 내려왔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직장, 인간관계, 연인 등등 인생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혹시나 영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갈팡질팡하는 나 같은 분들이 있다면, 내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도움이 될까 싶어 몇 자 적어본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법 첫 번째. 시간 압박에 시달려 급한 결정을 내리지 말 것.
런던은 대도시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연봉 몇 억을 버는 잘 나가는 사업가, 멋진 예술가, 직장인들도 많지만 사기꾼이나 남 등 처먹고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
런던 집 사기, 보이스피싱, 영국 의료보험(NHS) 사기 등등, 이러한 사기들을 결국 종합해보면 특징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면서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대부분 돈과 관련) 압박한다.
나는 굉장히 정교한 보이스피싱에 딱 한번 말려들 뻔한 적은 있지만 다행히도 돈을 잃어본 적은 없다. (하늘에 감사할 일)
집 뷰잉을 요청할 때도 좀 시간 여유를 두고 뷰잉 약속을 잡는 곳보다는 "당장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이렇게 집주인이 좀 급해 보이는 집은 경험상 좋지 않은 집들이다. 그리고 집을 보는 중에도 나를 압박하거나 빨리 결정을 내리길 재촉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좋은 집들은 이미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고 또 집주인 자체도 집이 금방 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집을 보여줄 때도 여유로움이 느껴지며 내가 묻는 질문에 하나하나 잘 대답해준다.
내가 지금까지 겪은 최악의 집 뷰잉 유형은 두 가지였다.
1. 내가 묻는 질문에 답을 안 하고 뭉뚱거리면서 집이 맘에 드냐 안 드냐만 계속해서 재촉하는 유형
2. 뷰잉 약속을 15분씩 굉장히 촘촘하게 잡아서 (3시 15분, 3시 30분, 3시 45분.. 등등) 뷰잉을 보러 온 사람이 굉장히 시간 압박에 쫓겨 결정을 하게 만드는 경우
영어에는 "Sleep on it"이라는 말이 있다. 우선 잠을 좀 자고 생각해보겠다는 의미다. 시간 압박을 느끼는데 확신이 오지 않는다? 결정을 내일로 미뤄라. 그래도 세상 안 무너진다. 뭣도 모르고 헐레벌떡 계약했다간 억지로 6개월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대가는 오로지 내가 짊어진다.
두 번째. 타인의 말과 내가 아는 것이 상충할 때, 나의 선택을 믿는다.
내가 영국에 와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추천이나 조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술 종류나 음식을 추천해달라고 해도 미적지근한 반응이 돌아온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취향/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추천을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내가 결정을 내리면 어느 정도 결과가 예측 가능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비슷하고, 좋은 직장에 대한 개념과 좋은 집, 이런 것들이 대부분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런던은 정말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이들이 살기 때문에,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결정을 내렸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
한 집을 보러 갔는데 집을 보여주는 세입자가 나한테 "이 방은 햇빛이 진짜 많이 들어온다. 내 말을 믿어라." 고 자신 있게 말을 했다. 해 질 녘 집을 보러 갔는데 구글맵으로 방향을 확인하니 창문이 정북향으로 나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 거대한 건물이 있어서 햇빛을 다 가리는데.. 도대체 어디가 햇빛이 많이 들어온다는 건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마다 '햇빛이 들어온다'는 기준이 달랐던 것임을 이해했다. 나에게 있어서 햇빛이 들어옴은 햇빛이 직접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고 이 친구에게 햇빛이 들어옴은 방이 반지하처럼 아예 어두컴컴하지만 않으면 밝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럴 때 내가 직접 확인한 결과나 검증을 믿지 않고 타인의 말을 근거로 결정을 하면 낭패를 본다.
연애의 기준도 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폴리아모리 (다자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고 관계 정립을 하지 않은 채 1년간 데이팅만 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동거만 오래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나한테 제일 좋은 건 뭐고 내 기준이 어떤지, 그게 제일 우선이 돼야 한다.
좋은 집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정원이 있는 집이 좋고 누군가는 10층짜리 현대식 아파트가 좋은 집이라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는 10명이랑 셰어 하는 집이 좋을 수 있고 누군가는 돈을 더 내더라도 혼자 사는 게 좋을 수 있다. 누군가는 코딱지만 한 방에 살아도 거실이 넓으면 좋다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는 거실이 없어도 방이 넓으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좋은 집"처럼 막연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선택지(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오퍼를 받을 때 계약서로 직접 사인을 하기 전까지 최대한 하던 면접을 끝까지 진행하는 게 좋다. 정보는 곧 파워다. 내가 아는 것이 많아야 (더 많은 회사가 날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그걸 근거로 더 자신감 있는 연봉협상이 가능하다.
나도 영국에 오기 전, 해외에서 취업을 한 다양한 사례를 수소문해 이분들의 경험을 경청했다. 미국, 영국, 독일.. 나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들의 경험담을 들었다. (물론 커피를 사거나 답례 등은 당연히) 이렇게 경험을 듣다 보면 해외 살이, 한국살이의 장단점이 보이게 되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그리기도 수월해진다.
해외에 사는 게 엄청난 위험부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해외에 대해 굉장히 많이 준비를 하고 사전 리서치를 하고 가면 그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다. 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대한 장단점이 뭔지를 하나하나 알아보고 따져보길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성격이 해외에 와서도 수월히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면접을 볼 때도 질문시간에 최대한 회사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고, 집을 볼 때도 질문을 많이 하고 심지어 연인관계에서 데이팅을 할 때도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어렸을 땐 질문을 하는 것이 상대에게 폐가 될까 봐, 그냥 대충 어느 정도 믿고 넘어가자 싶은 마음에 질문하는 과정을 생략했다면,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정 전에 질문을 최대한 많이 하고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알아가려고 한다.
어쨌든 결정을 내렸을 때 책임을 지는 건 누구? 나 자신이니까! 그 대가의 크기를 알면 질문을 소홀이 할 수 없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최고로 좋은 걸 주고싶다면 그 과정을 게을리 하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