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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비 Aug 11. 2021

나의 롤모델

금요일에는 항상 매니저와 1:1 면담을 한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최근 고민, 커리어 계획까지 정말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시간인데 롤모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있다. 나는 현 직장을 다니면서 생긴 롤모델이 있다. 빅 테크 회사 Faang (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and Google)의 디자인 매니저나 링크드인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대단한 사업가도 아닌, 나와 매일 아침 Stand up 미팅에서 얼굴을 맞대며 일하는 30대 후반 아저씨 Simon이다. 


우리 회사는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어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 외주를 주고 있다. Simon은 우리와 계약을 맺은 에이전시의 프로젝트 매니저다. 프로젝트의 큰 그림을 짜고, 처음부터 끝까지를 진두지휘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간에서 연락의 구심점이 되어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 회사에도 프로덕트 오너가 있지만 프로젝트 매니저와 프로덕트 오너는 엄연히 다른 role 이기 때문에 이건 다른 글에서 또 다시 이야기하겠다.)  


같은 디자이너도 아니고, 심지어 남들이 다 아는 유명한 회사를 다니거나 엄청난 월급을 버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사람이 내 롤모델이 되었을까? 



고등학교, 대학교, 한국 대기업과 현재의 영국 회사에 오기까지 나는 정말 수도 없이 날고 기는 인재들을 봐왔다. IBM, 구글, 페이스북, 내로라하는 곳에서 일하는 다양한 국적의 인재들, 주말에도 밤낮없이 일하면서 그것이 정말 진짜로 신나고 재밌기 때문에 일하는 워커홀릭들, 어쩜 저렇게 똑똑하나 싶을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고 말재간이 좋은 사람들 등등..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자기 통제가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다. 


나 또한 자기 통제가 굉장히 강한 스타일이다. 단연코 내가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목표는 없었다.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자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통제하고, 일하는 시간에 집중력을 쏟아붇는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건 물론이고 업무 시간 외에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노력에는 그만큼이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다.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 타인에게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원하는 회사를 꼭 가고 싶은 마음, 이번에 꼭 승진이 됐으면 하는 마음 등등.. 즉,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무조건 보상받는다고 믿으며 밤낮없이 일하고 공부하는 것도, 결국 내 주변 상황과 노력의 결과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저 사람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또는 "내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라고 가치 판단해 버리면 실패 또한 내가 통제할 수 있었던 부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에 인과관계를 찾고 싶어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통제하고 싶기 때문이다. 불확실하니까 불안하고, 그렇기에 그 불안함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원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은 인생사에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정말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제가 강한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소위 말하는 '열심히 사는 인생'을 너무나 오래 살아왔고, 그리고 이런 끊임없는 통제의 굴레 속에서 결국 번아웃이나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는 수많은 성취를 이루고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타인들을 정말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성취를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는 더 이상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주제가 아니다. 나는 그런 자기 통제가 강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이러한 자기 통제가 강한 이들이 리더가 됐을 때 흔히 발생하는 현상은 바로 마이크로 매니징 (Micromanaging)이다. 매니저의 역할 중 하나는 자신의 업무를 믿을 만한 이에게 잘 위임하는 것이다. 매니징은 자신이 관리하는 직원의 업무를 자신이 다 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해서 성공한 매니저들이 흔히 이런 실수를 한다. 매일 아침이나 저녁으로 작업을 확인하려 하고 부하직원을 가만 두지 않는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헐레벌떡 자신이 수습하려고 하고 부하직원이 스스로 탐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통제가 강한 사람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 팀원들까지도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 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Simon은 항상 표정이 편안하다. 다국적, 다문화에 악센트도 각기 다른 다른 팀원들과 1년이 넘는 장기 프로젝트를 이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오랜시간 봐온 Simon은 감정의 기복에 변함이 없다. 누구 한 명이 갑자기 인터넷에 문제가 생기거나 회의에 못 나오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이야기하자"라고 의연히 넘긴다. 재택근무 도중 자신의 아들이 화면에 뛰어들어 미팅을 방해할 때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의연히 넘기고 바로 본론으로 돌아간다. 오늘 미팅이 생각보다 준비가 안 돼있을 때도 맡은 팀원들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럼 이 미팅은 미루고 내일이나 내일모레 다시 이야기하자."라고 어깨를 으쓱한다. 뭐 하나가 잘못됐다고 우주가 망한 것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인생사가 원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내 팀원들은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 없음을, 업무라는 것이 항상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음을, 굉장히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같다. 그렇기에 Simon 은 똑같은 일을 해도 스트레스가 덜하다. 이건 무엇보다 Simon 그 자신에게 좋은 것이다. 스스로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덜하니까. 


그러나 아이러니 한건, 스스로를 편안하게 느끼는 프로젝트 매니저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은, 그들도 자연스레 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항상 불안해하고 스트레스받는 매니저 밑에는 스트레스받는 부하직원만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제 욕구를 버리고 일을 유동적이고 편안하게 진행시킬 때 업무 능률도 자연스럽게 같이 향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어 한다. 쥐어짜 내고 채찍질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진 모르나 나는 10년, 20년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나는 이렇게 통제 욕구를 내려놓을 줄 아는 게 사실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우리 회사는 Simon에게 어떻게 보면 클라이언트인데, Simon 또한 완벽한 작업물을 보여 주고 싶고 항상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불확실성과 작은 실수,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의연하고 능숙하게 넘기는 Simon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더 신뢰가 생겼다. 지나친 통제 욕구를 버리고 뜻대로 오지 않는 파도를 거스르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넘어오는 파도를 같이 타려는 사람. 내가 나중에 매니저가 된다면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원래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며, 원래 그렇게 마땅히 돼야 하는 것은 없으며, 똑같이 힘든 일이 있더라도 딱 아플 만큼만 아파할 뿐, 구태여 과도히 자책하고 받아야 되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까지 껴안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 


뭐가 잘 안되면,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잠도 우선 푹 자고, 내일 아침 일어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편안하게 웃으며 팀원들을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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