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직장을 잃는 수많은 영국인들을 보면서
제가 지금 현재 영국 회사에서 일한 지 세 달이 다 돼가고 있는데,
정말 이런 파란만장한 삶도 따로 없습니다.
입사 한 달 반 만에 Head of Design과 지난 브런치 글에도 언급했던 Business Owner가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로 갑자기 회사를 떠나는 것을 봐야 했고, 게다가 이 둘은 저의 채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 새로운 Marketing manager 가 Product 디자인에 대한 지식 하나도 없이 디자인팀을 이끄는 걸 보면서 제 직업 안정성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다 2주일 뒤 갑자기 디자인팀의 Lead Designer 가 디자인팀을 새로 이끌게 되는 변화를 겪었고, 그 후에는 저의 디자이너 라인 매니저가 일주일간 휴가를 가서 갑작스럽게 제 스스로 모든 디자인을 이끌고 해내야 했으며, 개고생 하면서 디자인을 해내고 팀원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기 시작하자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뭘까...
제가 영국에 오기 전 했던 결심 중에 하나는, 일에 집중하고 연애는 일에 방해되니 전혀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열심히 일을 해도 하루아침에 잘릴 수 있다는 점,
(Head of Design과 Business Owner 가 잘린 이유는 개인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내 비즈니스 전략 변경이나 사내 정치 같은 다른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추후 비자 지원은커녕 지금 당장 내일 내 밥그릇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일에 내 모든 자아를 의탁하는 것이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저만 겪는 특수한 상황이냐고요?
두 달 전 남자친구의 회사도 직원의 절반이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았고
(영국에선 1년에 한 번 tax year가 다가올 때마다 인건비용절감을 위해 인원감축을 시행합니다), 그중에 자신의 이름도 있었지만 매니저가 열심히 자신의 가치를 옹호해준 덕에 간신히 해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해고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회사에 22년 넘게 일했던 사람도 있었고요. 게다가 회계사인 남자친구의 아버지도 오래전 회사에서 한번 해고를 당한 적이 있고요.
(영국은 2년 이상 근무하면 사람을 자르기가 어려워서 2년이 되기 전 많이 자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회사에 대한 충성도나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내가 대비할 수 없는 '운 나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번 코로나가 갑작스럽게 터지면서 영국의 정말 많은 회사들이 또다시 대규모 인원감축을 했고, 남자친구의 형은 최근 직장에서 승진이 되었으나 코로나 발발 이후 일주일에 3일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고 이번 주에는 아예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물론 영국인이기에 직장이 없어도 똑같은 월급을 정부에서 받을 수 있지만, 다시 새로 직장을 구해야 할 텐데 지금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회사가 채용을 취소하거나 무기한 연기를 하고 있어요. (저희 회사도 채용 리스트에 있는 모든 role을 전부 채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요.)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너무 걱정이 되었는데, 오히려 남자친구는 덤덤하더라고요.
"오히려 잘됬어, 형이 원하는 프로젝트 하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됐잖아. 물론 힘들겠지만, 완전히 나쁜 상황은 아니야."
왜 이렇게 덤덤하고 긍정적인(?) 걸까???
Head of Design과 Business Owner 가 회사 내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음에도 회사를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을 봤을 때. 영국인 동료들에게 "너는 너네들의 자리가 잘릴까 봐 두렵지 않아?" 물어봤을 때도, 반응은 같았습니다.
"아니? 별로 걱정 안 돼. 난 오히려 최근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일을 적게 하기 시작했어. 열심히 하는 게 별로 소용없잖아."
"지금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없으니, 두려워할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걱정하면 돼."
라고 대부분 무덤덤하고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습니다.
저는 점차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왜 영국인 동료들이 단 하루도 야근을 하지 않는지. 오후 4시 반만 되면 칼같이 집에 가고 상사든 누구든 모두의 메신저를 단호히 씹는지. 일이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더라도 그냥 여유롭게 내일 생각하자며 넘기고, 아무도 한국처럼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패닉 하는 사람이 없는지...
왜 당당하게 "오늘 아침에 우리 할머니 약 배달하러 가야 돼서 좀 늦어", "애기 유치원 픽업하러 가야 해" 라면서 회사일을 미룰 수 있는지...
이 사람들에게 일은 단순히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가족, 또는 자신의 연인이 가장 소중할 뿐,
회사는 언제든지 잘리거나 변화할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회사에 충성을 강요하고, 야근문화가 강하게 정착돼있고 동료와 만나는 시간이 얼추 가족과 보내는 시간과 비슷한 한국은, 직업 안정성이 영국보다 강한 편입니다.
영국 (특히 런던)은 확실히 한국, 스웨덴에 비해 직업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이 영국 사람들이 이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방식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행복,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회사로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계약된 시간만 일하고, 그 안에서 주어진 일을 잘하고 회사에 잘 나오기만 하면 "working hard"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도 로봇처럼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굉장히 드물고 한국처럼 사람들이 별로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오늘부터 저는 일을 제외한 그냥 인간으로서의 나는 뭘 좋아하고, 뭘 할 때 행복하고, 뭘 할 때 불안한지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