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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스터 Jul 14. 2020

오천원의 추억

사람과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은 기적

 때는 1999년 겨울.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밀레니엄 버그로 인한 불안감이 교차하던 혼돈의 시대. 나는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어느 스키장에 있었다. 세기말이니 Y2K니 하는 것들에는 전혀,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술, 농구와 미팅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광란의 신입생 시절을 보내고 난 뒤, 몸과 마음은 피폐, 그 자체였다. 가장 큰 문제는 텅빈 지갑이었다. 알바 월급을 받는 대로 족족 술과 의미 없는 것들에 다 탕진해버렸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했다. 이제 곧 2학년이 되고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밥도 사먹이고 술도 사먹여야할텐데 지갑이 얇아선 선배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나처럼 한심한 친구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풋풋한 캠퍼스 로맨스를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애초에 과외같은 건 나와 맞지 않았다. 시간당 보수가 가장 높고 '잘만 이용하면' 대충 적당히 학생을 구워삶아 큰 노력없이 꽤 큰 돈을 챙길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최소한의 지식은 있어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나는 수능시험 다음날부터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고통스러웠던 수험생 시절의 기억을 지우려다 실수로 수험에 필요한 지식까지 다 지워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과외같이 따분한 일보다는 기왕이면 해보지 않은 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는 편이 더 좋았다.


 11월 말, 스키 시즌이 오픈하면서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친구중 한 놈이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큰 캐리어에 짐을 잔뜩 싸오더니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면서 횡성으로 겨우내 떠나있을 거라고 선언을 했다. 아직 남은 수업은? 기말고사는? 우리들의 물음에 그 친구는 진정한 큰 인물은 한낱 시험이나 수업따위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며 대범하게 웃으며 훌쩍 떠나버렸다. 그런데 애초에 큰 인물이 될 재목이었다면 중간고사 시험지에 적힌 과목명을 보고 나서야 엉뚱한 과목 시험에 들어와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리학 개론을 신청해놓고 그걸 까먹어서 거의 반학기동안을 일어 수업을 들으러 다닌 바보가 그런 말을 하니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녀석이 애초에 신청한 과목은 사회학 개론이었다. 내가 그런 녀석의 친구였다니)


 어쨌든 난 떠나가는 한심한 그 녀석을 비웃으며 학교생활에 매진했다. 나는 저 인간처럼은 되지는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학사경고를 맞은 상황에서 두 학기 연속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월 기말고사가 시작되고 전공 첫 시험이었던 회계원리를 백지로 낸 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시험을 잘 보려면 애초에 수업을 들었어야 했구나! 한국어로 써있었음에도 전혀 알아보기 힘든 용어가 난무한 시험은 거의 고문과 같았다. 성적은 뒤에서 1등이지만 시험지 제출은 늘 그랬듯 가장 먼저 제출하고 나와서 생각했다. '짐 싸자' 그렇게 나는 12월 중순, 친구 녀석의 비웃음과 멸시로 가득찬 환영인사를 받으며 횡성의 스키장 아르바이트에 취업했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티켓박스 옆에 차려진 사무실에서 온라인으로 할인권을 받아온 방문객에서 리프트권과 스키장비 렌탈권, 스키스쿨 강습권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그 때만해도 온라인의 활용도가 낮았기 때문에 티켓 하우스에서 그 일을 한번에 처리할 수 없어서 온라인 할인권 전용 데스크가 필요했던 것이다. 티켓박스와 렌탈하우스, 스키스쿨을 오가며 티켓과 할인권, 현금을 교환해주는 일따위를 하다보니 직원들과 금새 친해졌고, 스키장의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도 금방 빠삭해졌다.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르게 태어난 점, 그리고 사교성이 좋았던 점이 체대출신의 무섭게 생긴 형들로 득실대는 이곳에서도 귀여움을 받게 해주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주간에는 일을하고 야간에는 스키스쿨 형들에게 속성 강습을 받다보니 스키라고는 한 번도 타본적 없던 내가 한 달여만에 최상급자 코스에서 자유자재로 내려올만큼 실력이 좋아지게 되었다. 하루에 4-5시간동안 매일 스키를 신고 살다보니 삽시간에 에스키모화된 것이다. 월급보다 더 좋은 점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의 보스는 '왕이사님'으로 불리우는 사람이었는데 마치 횡성에 야생 흑곰이 산다면 저렇게 생겼을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모습의 상남자였다. 우람한 체격, 그리고 슬로프의 눈이 반사하는 빛에 타버린 탓에 얼굴이 시뻘겋다못해 흑색으로 보이는 무서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매우 말이 없고 근엄하고 무서운, 그러나 일과 부하직원 관리는 완벽에 가까운 그야말로 포스와 카리스마로 뭉쳐진 보스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나를 보면 옛 시절이 떠오르는지 만 스무살이 채 안된 내게만은 꽤나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사무실에서 함께 알바를 하던 다른 형들도 나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주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최고의 아르바이트였다. 때론 서울에서 흥청망청 술마시고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그립기도 했지만 심야 스키가 없던 시절, 슬로프의 불이 모두 꺼진뒤 직원숙소 앞 작은 포장마차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먹는 라면과 소주 한 잔도 꽤나 운치있는 경험이었다.


 성수기인 12월과 1월, 정신없던 날들이 지나고 2월이 되자 방문객 숫자도 한 풀 꺽이고 일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과 스키장을 잇는 셔틀버스가 쉴새 없이 오고가는 1월에는 버스가 도착할때마다 꽉 채운 인원들이 내리는 모습을 보며 '오늘도 전쟁같은 하루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2월이 되고 한 버스에 채 열명이 안되는 사람들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 즐거웠던 나의 첫 스키 시즌이 끝나간다는 생각에 때론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2월의 어느 날, 여느때와 같이 사무실에 앉아 친구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여유롭게 앉아있던 오후였다. 사무실 문 앞에 어떤 40대 중후반의 아저씨 한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손에 A4용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할인권을 뽑아왔지만 어디서 바꿔야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고 참견하기도 좋아하던 밝은 성격의 오지라퍼였던 당시의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할인권으로 티켓을 구매하시는 거라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저씨에게 말을 건네는데 뒤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그리고 좀 더 뒤에는 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다들 두리번거리고 낯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해보였다. 자연스럽게 '스키장에 처음 온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저가...이걸 뽑아왔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아저씨는 쭈뼛하며 대답을 했다. 자신없는 말투에 위축된 표정,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이 아저씨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손님들의 경우보다 조금씩 신경이 더 쓰이기 시작했다. 일단 여느 때처럼 안내를 해드리려고 다시 말을 건넸다.


"네,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티켓 구매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아저씨와 가족을 사무실 안으로 안내해드리면서 살펴보니 시야에 조금씩 그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좀 자세히 보니 일반적으로 스키장에 놀러온 가족의 모습과는 무언가 달랐다. 스키장에 놀러온 일반적인 가족들은 대개 들떠있고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재잘재잘 이야기 꽃을 피우는 밝은 모습이 보통이었다. 가족여행의 들뜬 마음을 보여주듯 옷차림도 밝고 화려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가족은 좀 달랐다. 아무리 처음 스키장에 온 것임을 감안해도 유달리 뭔가 기가 죽어있고,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내 과한 짐작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우리가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듯 위축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대중적으로 한결 만만한 레저스포츠가 되었지만 그때만해도 스키장에 놀러 간다는 것은 금전적으로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달리 낯설어 하는 가족들의 표정이 보통과는 달랐다. 그리고 상당히 남루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하면 좀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옷으로 챙겨입게 마련인데 이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누가봐도 10년 이상은 되어보이는 해지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이들조차 끈이 다 떨어진 낡은 운동화와 얇은 가을 점퍼를 하나씩 입은 것이 다였다. 아직 이곳은 영하의 날씨인데도 말이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살림이 상당히 어려운 가족으로 보였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먹으려고 꼬불쳐놓은 트윅스를 꺼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 스키장 와서 신나겠다. 스키 잘 타니?"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낯을 많이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아...저희 처음왔어요 스키장에"


 "아 네 그러셨구나, 저도 이 알바덕분에 이번에 처음 스키장에 와봤어요 하하하" 티켓 발급을 진행하며 어떻게 오셨는지 물어봤다. 그때만해도 난 대화가 끊기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인싸였고, 과한 오지라퍼였기 때문에 ,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족에 대해서 궁금함이 생겼기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약간 더듬거리고 자신없는 말투였지만 선한 미소와 함께 나의 물음에 친절히 답을 해주었다.


 수도권 외곽의 작은 도시에 사는 가족이었고, 예상대로 형편이 많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난 연말에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겨울 체험 프로그램으로 스키교육을 시켜주었는데 금전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보내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많이 섭섭해했겠다고 말을 건냈다. 그리고 많이 보챘을텐데 고생하셨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대답이 의외였다. 아이들은 서운해하는 티를 내지도 않고 보채거니 징징대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마 그런 일이 그동안 자주 있어왔고, 그래서 아이들은 갖고싶은 것을 표현하고 요구하는 것보다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먼저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순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몇몇 장면이 순간 머리 속을 지나쳐갔다.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이야기를 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보며 마음 한켠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스키장에 오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아저씨의 몸이 갑자기 나빠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당장 다음달 방세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이지만, 자가용도 없어서 셔틀버스가 다니는 서울 신촌까지 어렵게 찾아가느라 거의 반나절을 보내고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스키장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그 부부는 그렇게라도 아이들에게 스키장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보이며 처음만난 사람에게 굳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아저씨는 참 순수한 사람 같았다.


 '오후 2시에 와서 오후권 리프트 티켓을 받고, 장비와 스키복을 빌리고 착용하고 하다보면 정작 스키를 탈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키장의 규모도 컸고, 특히 처음 온 사람들은 티켓박스, 렌탈하우스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장비와 스키복을 착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티켓을 발급받으면 내가 서둘러 장비와 스키복 대여를 도와주고 착용까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하면 그래도 두어시간 정도는 스키를 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이미 기한이 지난 할인권을 가져왔다. 당시 할인권은 남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복잡한 조건이 정해져있었다. 차수를 나눠서 정해진 기간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중 한 방법이었는데 복잡한 할인권 규정에 작게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은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알고있었지만 새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용기간을 잘 보이게 써놓던지, 아니면 기한을 없애던지 했어야지 뭐하는 거지 대체?'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피씨 화면과 할인권을 번갈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내게 와서 상황을 물었다. 친구도 이 가족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순하고 선한 얼굴을 가진 이 가족에게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스키장의 분위기에 조금씩 익숙해지며 얼굴 표정이 점차 밝아지고 있던 남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와 관계없는 아이들이고 처음 만나는 가족인데도 마치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 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사실을 이야기하고 티켓박스에 가서 40%나 비싼 정상가의 리프트 티켓을 구매하셔야한다고 말해야했다. 어차피 난 단기 알바라서 뭔가를 해줄 능력도 권한도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급여를 스키시즌이 끝나는 2월에 한꺼번에 받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수중에 돈도 없었다. 스키장에 박혀 일만 했고, 숙식이 제공되니 돈을 쓸 일도 없었기 때문에 돈을 넉넉히 가지고 있을리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내가 왜 다른 가족의 일에 끼어든단 말인가?


 그러나 머리속에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중 가장 명확해보이고 유일해보이는 답이 곧 내 머리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마침 왕이사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방문객이 성수기만큼 많지는 않아서 사무실 일도 별로 없었다. 자리는 친구에게 봐달라고 하면 될 터였다. 티켓박스와 렌탈하우스, 스키스쿨 모두 내가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나도 어릴때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중학교때까지 연탄을 때는 집에서 살아야했고(90년대 중반이었는데!), 아버지가 안성의 벽돌공장에 취업한 뒤로는 엄마는 나와 동생 형제를 홀로 키워야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월급만으로는 우리 형제를 부양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에 엄마는 늘 화장품 방문판매, 보험설계사와 같은 일을 해야했고 토끼인형에 눈알을 붙이는 일까지도 해야했다. 그렇게 부모님이 바빴고, 그럼에도 여전히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캉스는 커녕 주말 나들이도 우리 가족에게는 올림픽과 같았다. 3-4년에 한 번 갈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에 롤러스케이트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우리 집과 다들 비슷한 처지였고 그래서 오래된 주공아파트에 살던 처지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롤러 스케이트 하나씩 사줄 형편은 되었던 모양이다. 나와 내 동생만 없었다. 늘 그랬듯 아버지는 돈벌러 안성의 공장에 가 있었고, 집안일에 화장품 방판에 토끼인형 눈을 붙이는 일로 지쳐 예민해져있던 엄마에게 말해봤자 핀잔이나 들을 참이었다. 그래서 나와 내 동생은 감히 롤러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말을 꺼내보지도 못했다. 지금 내 눈앞의 두 남매처럼 지레 포기했었다. 어린 아이가 무엇인가를 갈구할때 그것을 어필도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 마음을 어떻게 먹어야 가능한 일일까.

롤러스케이트가 없었지만 어린 마음에 혹시나하고 아이들이 롤러를 타고 놀때 나는 나오지 않은 아이가 누구인지부터 살폈다. 그리고 나오지 않은 집으로 롤러스케이트를 빌리러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 집이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 그래서 롤러가 없어서 빌려달라는 아쉬운 말을 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창피하고 싫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더 슬펐던 것은 그럼에도 그게 그렇게 한 번 타보고 싶어서, 그걸 타고 아이들과 같이 달리고 싶어서, 나만큼 롤러를 타보고 싶어하는 동생의 기대를 꺾기가 싫어서 창피함을 꾸역꾸역 누르고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히 남아있다. 차라리 집 안에 아무도 없어서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내 스스로 합리화를 시킬 수도 있고, 동생에게 말하기도 편할테니까. 그렇게 어렵게 빌린 롤러는 나와 동생이 번갈아 타야했다. 그러다 그 롤러의 주인인 친구가 나오면 아홉 살의 나와 여덟 살의 동생은 자연스럽게 롤러를 그 친구에게 돌려주고 길바닥에 앉아 친구들이 신나게 롤러를 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버렸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와 내 동생은 '부럽다' '재미있겠다'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이라도 해버리면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 울음으로 터져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잠시 내 어린 시절 기억들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괴로웠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깊숙한 곳에 인두로 지진듯 강하게 남아있는 가난과 결핍이라는 감정이 다시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이 마치 그 시절의 나와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공연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때 그 시절 내가 느꼈던 창피함과 부러움, 그리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눈 앞의 아이들에게 시선이 가게 되었다. 해맑고 천진난만해야할 아이들도 낯설은 공간,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 스키어들 속에서 위축되어 있었고 조용히 눈만 껌벅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리를 비운 보스에게 연락을 취해 허락을 맡을 시간은 없었다. 사실 시간보다도 용기가 없었다. 허락을 해줄지도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 그 가족을 데리고 나왔다. 어디가는 거냐고, 책임질 수 있겠냐고 묻는 친구에게 오늘 이 분들을 내가 모시겠다고 말했고 내 마음을 이해한 친구는 보스에게 이야기해두겠다며 얼른 가라고 해주었다. 우유부단함이 특기라서 밀쓰(밀크쓰레기)라고도 불렸던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와 결심이 나왔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할인 티켓 발급을 멈추고 가족들을 데리고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노라고 말한 뒤 사무실 밖으로 나와 티켓 박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다른 할인을 받을 방법이 있을 터였다. 영문을 몰라하는 가족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티켓박스로 들어가서 주임님께 사정을 이야기했다. 스키장에 처음 온 가족인데 날짜가 지난 할인권을 들고 왔다, 고객의 실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해를 불러일으킨 기업의 실수도 있으니 쓸 수 있는 할인권을 좀 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은 주임님은 흔쾌히 할인권들을 내주었고 원래의 할인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천원 차이나지 않는 금액으로 세 명의 리프트권을 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가지고 (몰래) 온 친구 녀석의 직원용 리프트권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렇게 네 가족 모두 리프트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는 이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연신 말했고, 나는 그 가족이 행여 미안해할까봐 "비수기라 여유가 좀 있어서 저희 팀에서 드리는 서비스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다음에 또 찾아주세요"라고 넉살 좋게 둘러댔다.


 다음으로 들른 렌탈하우스는 쉬웠다. 애초에 보유하고 있는 스키장비와 스키복은 넉넉히 쌓여있었고, 직원들끼리는 담당 직원에게 허락만 맡으면 얼마든지 빌려 쓸 수 있었다(그때는 그런게 가능했다) 가족의 사연을 들은 담당 직원 형은 팔을 걷어 붙이며 본인이 돕겠다고 나섰고, 네 가족의 스키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스키장비를 착용시켜주었다. 나는 그 사이에 다시 사무실에 뛰어가서 내 직원용 리프트권을 챙기고 스키복과 장비를 착용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마침 제가 한가해서 시간이 좀 있으니 스키를 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그렇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며 한사코 사양을 하는 바람에 내가 좀 오버했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평평한 슬로프에서도 걷는 것조차 하지못하는 네 가족을 보니 내가 가버리면 오늘내로는 리프트 탑승장까지도 못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너무 이쁘고 착해서요, 제가 좀 놀아주고 싶어서 그래요. 자 이리 오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투머치, 너무 과한 행동이었다. 내가 뭐라고 남의 가족의 나들이에 이렇게 낀단 말인가,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재차 삼차 사양을 하는데도 내가 무슨 권리로? 그러나 그때는 내가 오지랖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에게 내가 느꼈던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마음을 추수리는 일 같은 건 오늘만은 느끼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괜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 글을 끄적여서 괜시리 욕먹을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과한 영웅심을 가졌거나, 값싼 동정으로 그 가족을 불쾌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이글은 내가 뭘 잘 했고, 그걸 자랑스레 들추어내려고 쓰는게 아니다. 단지 내가 한 행동, 내가 겪은 일을 되돌아보고 내 삶에 그 일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안정적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고, 스무살의 나는 특히 더 미숙했던 것, 그 뿐이다. 이 글은 내 추억을 담은 일기장이기도 하고, 어리숙했지만 순수했고 따뜻한 어설픔이 있었던 내 청춘의 어느 하루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부부에게 슬로프에서 넘어지고 일어나는 법, 걷는 법, A자 모양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법 따위의 초급 기술들을 가르쳐주었다. 강사 자격증도 없는 알바 신세였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돈을 받고 가르친 것도 아니었으니 아무렴 어떤가. 아이들은 역시 빨랐다.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직접 두어번 해보면 금새 곧잘 따라했다. 아주머니도 처음에는 쭈뼛쭈뼛 했지만 곧 달라졌다. 흰 슬로프가 주는 상쾌함, 흥겹고 신나는 분위기, 나의 몸개그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조금씩 미소를 짓더니 아이들이 A자 자세를 성공하자 박수를 치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몸이 좀 불편했던 탓에 스키를 신고 서있거나 조금 걷는 정도였지만 당시의 내가 느끼기에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강습을 해 준 것은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자격도 없는 사이비 주제에 아이들한테 스키를 가르쳤다고 나중에 혼나기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열과 성을 다했다. 내가 즐거웠기 때문이고, 또 아이들이 너무 신나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또래 여자애들을 꼬시기 위한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던지고 살던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전력을 다하고, 그 과정에서 환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풀이 죽어있고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신나했다. '이렇게 밝은 아이들이었구나' 허탈하고, 안타깝고. 혀 끝이 썼다. 고맙고 미안했다.


 90년대 후반이 되면서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그렇다고 여유가 생긴 정도도 아니었으면서)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술과 담배, 그리고 게임과 의미없는 시간들로 낭비하며 살아왔던 내게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아이들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준 것은 그야말로 작고 미천한 것이었지만 도리어 큰 무엇인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리프트를 타고 초급자 슬로프를 천천히 내려올 정도가 되자 주간운영시간이 종료되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도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라고 했다. 내심 아이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슬로프 하단에서 친구놈이 따뜻한 어묵과 핫도그를 사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녀석도 도움을 주지못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친구녀석은 뻘쭘했는지 내게 음식들을 안기듯 주고 사무실로 뛰어가버렸고, 벌써 몇 시간째 추운 스키장에서 몸을 구른 아이들은 음식들을 허겁지겁 맛있게 먹어 치웠고,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또 한바탕 웃었다.


 스키복과 스키장비를 대신 반납하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예의바르게 내게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내년에도 또 놀러와, 형아가 기다리고 있을께, 이번처럼 또 놀자 알았지?"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자꾸 고마워서 어떻게 하냐며 내게 미안해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그 것에서 내가 행복해짐을 느끼는 것. 경이로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었다. "아니에요 맨날 여기 틀어박혀서 티켓만 팔고 살았는데 저도 덕분에 오늘 너무 신나게 잘 놀았습니다 하하하"


 우리는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기분 좋게 헤어졌다. 사무실로 돌아오며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점차 잊고있었던 공포가 스멀스멀 내 등뒤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로 왕이사의 얼굴을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동안 행복한 감정의 바다에서 유유자적 헤엄치고 놀다가 현실로 돌아와보니 큰일이었다. 거의 4시간이나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무섭고 근엄한 카리스마로 사무실을 휘어잡는 캐릭터였던 왕이사가 나를 어떻게 요리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말을 안듣는 직원을 밤에 조용히 불러내서 슬로프에 묻어버렸다는데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생각난 핸드폰을 열어보니 이미 왕이사의 전화가 여러 통이 와있었고, 내가 죽으면 내 운동화를 가져도 되냐는 친구놈의 문자가 와있었다.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왕이사에게 맞아 죽으면 장례때 그 자식을 반드시 순장시켜야겠다고.


사무실에 돌아와 문을 슬쩍 열어보니 왕이사님이 뒤돌아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텅빈 슬로프를 보는 키 190, 거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HP와 MP가 모두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이사님" 왕이사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언컨대 그 짧은 시간이 내게는 영겁과 같이 느껴졌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볼까? 아니다, 그러면 진짜 피살당할거야'

'불쌍한 척하면서 울어볼까?'

'친구녀석이 시켰다고 해볼까?' 라고 생각하면서 친구를 바라보니 녀석은 턱을 치켜세우고 나를 내려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내 운동화를 가리키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운좋게 살아나도 저 녀석만은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라고 다짐을 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왕이사에게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했고,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그로 인해 발생한 소란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다. 내가 빌린 스키복과 장비도 댓가를 치르겠다. 단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월급에서 차감해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이사님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네 놈이 자리를 비운 4시간의 급여도 제할거다."


"네? 아, 네"


"일단 자리로 가있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친구가 옆에 다가왔길래 물었더니 녀석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은 이야기를 왕이사에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이것으로 꾸중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2차 웨이브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하고 두려웠다. 몇 분이 지난 뒤 왕이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외투를 입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드디어 슬로프에 매장될 시간이 온 것인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친구를 데려가고 싶어졌다. 왕이사가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외투를 줏어 입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엉겁결에 함께 일어나 점퍼를 입었다. 왕이사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떼는 순간, 사무실의 문이 삐걱 하는 소리를 내며 조금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왕이사에게서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모습이 드러난 것은 아까 그 아저씨였다.


 '무슨 일이지? 뭐 두고 오신 거라도 있으신건가? 내가 뭘 잘못한건가?'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내게 손짓으로 잠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왕이사의 눈치를 살폈고, 왕이사는 다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며 무언의 허락을 해주었다. 냉큼 문으로 뛰어가서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나준 아저씨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아저씨 아직 안가신거에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왕이사에 대한 공포로 흥분되어 있었는지 말이 정신없이 나왔다.


 아저씨는 별다른 말 없이 내게 두 번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무엇인지 보니 꾸깃한 오천원짜리 지폐였다. 이게 어떤 상황인가 감을 못잡고 어버버하고 있는 내게 아저씨는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신세라서 애들 신경도 못쓰고 살았는데 어찌어찌 스키장에 처음왔고, 돈이 모자라서 자신은 스키를 타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스키복이 있어야하는 줄도 몰라서 면바지에 가을 점퍼 차림 그대로 스키를 탈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강습을 받을 돈은 없어서 그냥 평평한 슬로프 하단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다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감정들이 날 북받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터져나왔다. 기억나는 것은 단지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고 도와줬는지, 본인을 행색이 남루하긴 했던 모양이다라고 살짝 웃어보일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고, 이렇게나 활짝 웃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고 했다. 그래서 내게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수중에 현금도 넉넉하지 않고 또 뭘 좋아할지 몰라서 돈을 주는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것을 사먹으라고 내게 따뜻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아이들 배고플텐데 먹을거라도 사주시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하지 못했다. 단지 아니라고 괜찮다고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을 했지만 아저씨는 내 손에 쥐여진 오천원짜리 지폐를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던 열아홉의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왕이사를 바라보았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사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받으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아저씨는 이미 뒷걸음질치며 멀리 가고 있었다. 오후 내내 짓고 있던 평화로운 미소와 함께. 나는 그저 아저씨와 오천원짜리 지폐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설움과 아픔이 모두 치유되고 있었다. 마음에 지고있던 응어리가 씻겨내려가는듯 했다. 뒤늦게 밖으로 나온 친구에게 롤러를 돌려주면서 느꼈던 기분, 롤러를 빌리러 온 내게 짓던 아줌마의 달갑지 않은 표정, 빌리지 못했을 때 짓던 동생의 실망스러운 얼굴, 그리고 동생과 함께 길 바닥에 앉아 아이들이 롤러를 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이. 내 기억속 아홉살의 내가 열아홉의 내게 이제야 비로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것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십년동안 품고 살았던 서럽고 서러운 마음이 씻기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자리에 멈춰서서 잠시 감정을 추스린 뒤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사님 앞에 멈추자 이사님이 내게 짤막하게 말을 건넸다. "잘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숨기느라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 인생에 이 돈보다 값비싼 돈은 벌기 힘들거다." 그 뒤로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왕이사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 있다. 그 뒤로 여러 곳에서 여러 일을 하며 돈을 벌어보고 쓰기도 해보았지만 그 오천원짜리보다 더 값진 돈은 아직도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왕이사는 나와 친구녀석을 숙소앞 포장마차로 데리고 가서 소주를 사줬다. 역시나 말이 없어서 무슨 속내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를 대견해하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히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굳이 이런 저런 핑계나 해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왕이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음씨 좋고 유쾌한 내 친구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술이 좋았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서 느낀 것들과 스스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겨울이 되면 그날 밤 바라보았던 눈송이의 나풀거림과 라면의 달큰한 향기가 아직도 내 눈과 코에 남아있는 듯 어른거린다.


 그 후 군대도 다녀오고 지갑도 몇 차례 잃어버리고 다시 바꾸는 과정에서 그 오천원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나도 그 때의 어리숙함과 순수함을 다 잃어버렸다. 이제 중년의 문턱에 접어들었고, 능숙하고 계산적인 사회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낭만이니 순수니 하는 말들이 더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듯 입밖에 꺼내지 않게 된지도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가끔씩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눈이 오지도 않고, 스키장에 있지도 않지만 아무런 맥락없이 그 아이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천원짜리 지폐를 쥐어줄때 느꼈던 아저씨 손의 온기가 떠오른다.


 그 때 그 아이들도 벌써 30대가 되었을 것 같다. 나와 만난 뒤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이상 위축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것이라도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를, 자신있고 당당하게,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를 소망한다. 내 아버지, 엄마를 닮았던 그늘진 표정의 그 부모님에게도 지금은 평화롭고 안락한 노후가 함께하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 날의 기적은 그 가족에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꾸깃한 오천원짜리 지폐를 받은 내 마음속에 생긴 작은 물결이 바로 그 기적이었다. 놈팽이와 다름 없는 삶을 살던 나를 그 오천원짜리 지폐 한 장이 바꾸었다.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짧은 순간을 빛나게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진정성을 가지고 돕는 것. 진정성으로 인간을 대할때 만들어질 수 있는 작은 기적. 이미 열아홉의 나와 서른아홉의 나는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달라졌다. 순수함이 변질되고 사라진 것 같아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날의 작은 기적이 만든 내 마음속 물결은 아직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그 날의 감정만은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아홉살의 나와 열아홉의 나, 그리고 서른 아홉이 된 내가 그 날의 감정을 공유하며 마음속에서 빙긋 미소지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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