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과 개밥그릇, 그리고 동물원

조금 느린 아이와 함께하는 책육아

by 권이은

- 좀처럼 확장되지 않는 아이의 관심 영역




칠판이 산산조각 난 게 웃겨


저는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앤과 길버트의 만남은 앤이 길버트의 머리에 작은 칠판을 내려 치면서 시작되죠. 저는 어렸을 때 앤을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는데요. 애니메이션에서 앤이 길버트의 머리를 내려 친 순간 칠판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저는 그때 칠판이 산산조각 나는 그 장면이 매우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나 세게 친 거지' 하면서요.


출처 : 빨간 머리 앤


혹시 앤을 좋아하시는 분들 중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재미있어했던 분 있으신가요? 아마 거의 없으실 거예요. 칠판이 부서지는 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겠어요. 아, 아니라고요? 칠판처럼 둘의 관계가 산산조각났으니 중요한 표현 아니냐고요?


솔직히 전체 이야기에서 '칠판이 부서졌다'는 그 자체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죠. 길버트가 앤을 놀려서 앤이 화가났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칠판으로 가격했다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냥 칠판이 부서진다는 그 사실이 재미있었어요. 커다란 교실 칠판을 내리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고요. TV 방영 만화여서 그 부분만 반복해서 볼 수는 없었지만요.




개밥그릇이 웃겨


아이가 한국 나이로 4살쯤 되었을 때, 저는 아이에게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나는 개다>를 처음 보여주었습니다. 저희 아이는 새로운 것, 낯선 것에 대해 거부감이 큰 아이라서, 새 책을 보여주면서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날도 그냥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읽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아이가 처음 보는 이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기뻤던 저는 '역시 백희나 작가님 그림책 아이들이 좋아하지!' 하면서 그 책을 산 저를 셀프 칭찬하고 있었답니다.

출처 : <나는 개다> *온라인 서점에 공개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아이가 이 그림책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페이지만 계속 펼쳐서 보고 있는 거예요. 그 페이지가 바로 개밥그릇이 나오는 페이지였어요. 혹시 나는 개다를 읽어보신 분 있으신가요? 거기서 개밥그릇이 어디에 나오는지 기억나는 분 있으신가요? 아마 별로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림책 초반에 이 책의 주인공 구슬이(개)가 어미 젖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 시점에 동동이(주인공 남자 아이)네로 오게 되는데요. 그 이야기가 나오는 페이지의 오른쪽 하단에 그려져 있답니다. 역시 잘 생각이 안나시죠? 중요한 내용은 아니거든요.





이제는 좀 전체 내용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아이가 한 페이지를 보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요? 그렇죠. 한두 번 그럴 땐 저도 귀여웠어요. 아이가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어쨌든 새 책에 관심을 가진다는 게 기쁘고, 개밥그릇을 가리키면서 깔깔 웃는 아이가 너무 귀엽더라고요. 아마도 개도 밥을 먹는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개밥그릇이 뭔지, 개가 무엇을 먹는지 설명도 해주고요. 공감을 시도했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정말 두 달 정도 계속 그 개밥그릇이 나오는 페이지만 펴려고 하고, 다른 페이지는 보려고도 안 하니..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더라고요. 분명히 나는 독서에서 아이의 취향을 존중하라고 강조해왔는데, 막상 내 아이가 이렇게 하나에 집착하니 조급한 마음도 들었어요. (심지어 제가 강의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이 '아이들의 주체성을 키워주세요. 선택 경험을 주세요. 읽기 효능감을 올려주세요.'와 같은 내용이거든요. 허허허.)



개밥그릇으로 시작하는 대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이는 두 달 정도 그렇게 개밥그릇을 보다가 다른 페이지에 나온 할머니로 관심사가 옮겨가고, 할머니 사랑이 또 한참 진행되다가, 아주아주 천천히 책의 중요한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야기 전개에서 핵심 사건이 나오는 곳과 이야기의 결론 부분을 관심을 갖고 유심히 보기도 하고요.


그렇게 되려면 매번 아이가 그 페이지만 읽고 그대로 책을 덮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이가 그 페이지를 보고 싶어 하면, 먼저 그 페이지를 먼저 볼 수 있게 존중해주면서 그 페이지의 앞 뒷면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켰어요. 예를 들면, '개 밥은 누가 먹지? 구슬이가 먹었구나. 구슬이는 어디로 갔지. 아 동동이네 집으로 갔네.' 하면서 이야기를 개밥그릇으로부터 확장시켜나가는 것이죠. (이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전략'이 중요한데요. 그 내용은 다른 글에서 한 번 자세히 다루어보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책 중에 <브루노 무나리의 동물원>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그림책은 어른이 보기에는 참 별 거 없어 보이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 독특한 그림책이에요. 그 그림책의 매력은 -물론 다양하겠지만- 바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아이가 동물원에 가서 이 동물, 저 동물 어떤 동물을 먼저 봐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 그림책도 어느 페이지를 펴서 봐도 동물원의 동물 구경하는 느낌으로 볼 수 있거든요. 한참 한 종류의 동물에 관심을 가지다가 다른 동물이 나오는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거죠.


브루노 무나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정말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탐색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고 그런 그림책을 만들어준 거죠. 더 흥미로운 부분은 '네가 자유롭게 탐색해도 좋은데 다른 페이지에도 재미있는 것이 있어.'하며 다른 페이지도 보라고 계속해서 유혹하는 '나비'가 함께 나온답니다. 그런 멋진 그림책 덕분에 제가 아이를 그래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를 포기하지 않게 된 것 같아서 그분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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