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J 엄마의 고뇌

조금 느린 아이와 함께하는 책육아

by 권이은


-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리가 없지




MBTI 성격유형검사를 처음 했던 건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성격 유형은 그 시절 교육대학교에서 보기 힘든 유형이었던 ENTP였지요. 논쟁을 즐기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저였지만, 박사 과정을 거치며 현실성이 추가되어 ENTJ로 성격유형이 바뀌어버렸습니다.(박사논문을 쓰면 성격이 바뀝니다.)


ENTJ 유형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리더형이죠. 장기적인 계획과 거시적인 비전을 선호하며 논리 분석적인 것을 선호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육아라는 것은 장기적 계획, 거시적 비전, 논리 분석적인 것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아이와의 생활이라는 것을, 육아에 조금이라도 참여해본 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녀 교육 계획?


장기적인 계획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아이를 낳기 전에 많은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백일까지는 도우미 님과 함께 생활하고, 두 돌까지는 남편과 엄마의 도움으로 휴직 상태에서 아이를 키우고, 두 돌이 지나면 아이 양육을 도와주실 고용인을 모시고,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일에 복귀하면 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죠.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다섯살이 되면, 여덟살이 되면, 10대가 되면... 대학 가서의 생활까지 미리 생각을 했었죠.(임신하기 전에요). 정말 지금 생각하면 저의 이런 성격 때문에 남편이 참 피곤했겠다 싶습니다(아마 지금도?).



너무 여러 번 말해서 아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아이는 제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의 기질을 제가 너무 얕본 탓이겠지요. 교육학자로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환경의 영향이 엄청 크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질의 힘도 만만치 않거든요. 저와 상반되는 성격의 아이를 키우자니 답답하고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도 자신과 상반되는 성격의 엄마와 살아가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마 모든 엄마들이 이성적으로는 다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그래도 순간순간 울컥 치솟는 열받음을 참기 어렵다는 것...)



과잉기대 속 자라나는 불만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새 책을 샀을 때의 기쁨이 정말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기 전에도 친구들에게 물려받은 책, 제가 산 그림책, 선물 받은 수많은 전집(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주변에서 아이 책 선물을 많이 해주더라고요)들을 책꽂이에 쫙 꽂아두니 뿌듯하더라고요. 문제는 좁은 집에 책이 너무 많다는 것 뿐이었죠. 그 책들을 보면서 ‘3-4살까지는 이 정도 수준의 책을 읽어주고 다 읽으면 처분하고, 5살이 넘으면 이 정도 책을 읽어주고, 다 읽으면 처분하면 되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죠. 제가 저의 과거를 돌아보며 글로 쓰고 있으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납니다. 독서교육 전공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다른 아이들은 아니어도 내 자식은 뭐든지 단계별로 착착 클리어 할 것이라는, 허망하고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나름 전문가라는 저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부모의 태도를 학문적 용어로 '과잉기대'라고 합니다.)



첩첩산중이라고... 지식 탐구를 좋아하고, 새로운 것 알기를 매우 즐기는 저와 달리, 아이는 호기심이 별로 없는 성격입니다. 기존에 친숙하고, 잘하는 것을 다시 할 때 즐거워하는 기질의 아이이죠. 그러니까 아이는 새 책을 주면 도망가기가 바쁩니다. '이렇게 책이 많은데! 저 책만 계속보다니!' 처음에는(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아이의 이런 면이 정말 속상하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디폴트가 아니었나? 하고 놀랍기도 했고, 당황스럽게 느껴졌지요.



친숙하게 느낄 때까지


어제도 평소처럼 인내심을 최대치로 발휘하며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평소에 잘 읽어주지 않은 책이어서 그런지, 아이가 너무 심하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라고요. 겨우겨우 책을 다 읽고, 인증 사진(기록용으로 찍고 있어요)을 찍었어요. 이제 엄마가 그만 읽겠구나 하고 느낀 아이가 부리나케 자기 방으로 달려가버리더라고요.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서 저도 휴대폰에 눈을 돌리고 아이 사진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 판다' 하면서 다른 책을 가지고 제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책을 펼쳐서 저에게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며 신나게 보기 시작하는데... 아이가 가져온 그 책은 제가 예전에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아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구나 하고 느꼈던 바로 책이었습니다. 제가 사진으로 기록해둔 것을 찾아보니 정확하게 한 달 반 전이네요. 그 뒤로도 몇 번 그 책을 읽어주었고, 그 때마다 아이는 제가 읽어주는 내용을 안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그 책과 친해지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천천히 친해질 때까지, 얼마나 큰 인내심이 필요한지, 열받아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정말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어떤 책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친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아이의 태도 변화는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양상이기에, ENTJ의 엄마는 오늘도 속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 딸인걸요. 아이가 새로운 책,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지식과 친해질 때까지 오늘도 한 번 눌러 참아봅니다. 그렇게 아이를 다 키우고 나면 저의 성격유형도 또 한 번 바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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