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린 아이와 함께하는 책육아
제가 부모교육을 진행하면서 영유아 부모님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아이가 책장을 마구 넘기는데 어떻게 대처하느냐’입니다. 아주 어린 아가들의 경우에는 책을 장난감으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주변에서 책을 어떻게 보는지, 부모가 책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 보면서) 자연스럽게 책이라는 것의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책장 넘기기 행동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소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발달이 느린 아이들은 (다른 것들의 개념이 잘 형성되지 않는 것처럼) 책에 대한 개념 또한 잘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5세, 6세가 되어도 자기 마음대로 책장을 넘기고 있죠. 그런 아이들에게는 책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보는 것인지 자주 보여주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장을 마구 넘길 때면 ‘책은 이렇게 한 장씩 넘기면서 보는 거야’라고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책에 대한 개념이 있어도 책장을 마구 넘기는데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책을 읽어주는 부모는 ‘아이가 책 읽어주기를 싫어하는구나’하며 좌절하고, 의지를 가지고 시작했던 책 읽어주기를 그만두고 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려고 하면 아이가 책장을 마구잡이로 넘겨서 화가 나는 일이 많았어요. (지금도 물론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졌어요.) 아이가 책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문제가 무엇일까 하며 아이를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다음의 경우에 책장을 넘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재미없어요 형
책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 읽고 있고, 나는 재미가 없으니 빨리 이 상황을 종료하고 싶다
2. 여기 볼래요 형
책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는 알고 있으니 얼른 펴서 봐야겠다
3. 견딜 수 없어 형
싫어하는 주제, 그림 등이 나오는 책이라서 앉아서 같이 볼 수가 없다
많은 부모님들이 3번 '견딜 수 없어' 유형은 많이들 알고 계십니다. 어른들 중에서도 싫은 주제나 그림은 잘 못 견디는 분들 있거든요(예를 들어 곤충 그림책!). 2번 유형도 이해가 쉽죠.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관심사가 제한적인 아이가 어떤 책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 보이면, 그 부분부터 읽으면서 앞뒤로 서서히 넓혀 나가는 방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의외로 부모님들이 1번 '재미없어요'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어린이의 독서는 재미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재미없다고 하니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죠. 그리고 아이들이 말하는 '재미없어요'의 숨은 뜻을 어른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재미에 대해 이해하려면 독서의 인지와 정서에 대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책, 어려운 책을 재미없다고 느끼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로 자세히 쓸 예정입니다.) 이러한 감정과 표현은 커가면서 구체적으로 분화됩니다.
어른은 어려운 책을 읽을 때면 ‘어려워서 읽기 싫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어렵지만 재미있네’라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요. ‘진입장벽이 높지만 재미있는 책’이라는 책 후기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책의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해서 초반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책, 그렇지만 다 읽은 사람들에게는 호평일색인 책들을 그렇게 말하죠. 어른들은 이렇게 책의 재미와 난도를 구분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어려운 책을 재미없는 책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책을 마구 넘길 때에는 아이가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려워서 재미없다고 느껴질 수 있어.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내용을 이해하면 재미있단다. 엄마아빠가 도와줄게!‘하며 책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설명해줄 필요가 있지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부연 설명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부모의 부연 설명은 ‘책의 내용에 추가된 또 다른 언어적 정보’이기 때문에, 읽기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인지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서 계속 설명을 덧붙여 오셨다면 이제부터 과감하게 그 습관을 끊어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아이의 책장 넘기기 습관이 나아진 원인은 역시 이해력이 약간 좋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더라고요. 아직까지도 본인 수준에 어려운 책은 책장을 막 넘기긴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는 책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이해력이 나아질 때까지 어떻게 독서 지도를 해야 할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이가 크면 클수록 책장 마구 넘기기 같은 나쁜 습관을 바꾸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자기 취향이 확고해지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 4-5살이 되어도 책장을 마구 넘긴다면 조금은 부모님 주도로 독서를 진행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아이와 같이 책을 읽으면 아이가 책장을 함께 넘기도록 권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아이의 마구 책장 넘기기 습관이 나이가 들어도 지속된다면, 책장 넘기기의 주도권을 부모가 조금 더 갖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 한 권 정도만이라도 아이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마시고, 아이와 마주보고, 부모님께서 직접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순서에 맞게 읽어주세요. 그림도 같이 자세히 보면서 이야기 나누어 보고요. 아이는 점점 ‘아, 책은 종이를 왼쪽으로 넘기면서 모든 종이가 다 넘어갈 때까지 다 들어야 재미있구나’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루 한 권 부모 주도로 독서 했다면 다른 책을 볼 때는 아이 주도로 자유롭게 탐색하도록 해주세요. 어쨌든 책장은 넘기라고 있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