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중년의 부부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30년, 작년과 올해 연이어 자식 둘을 모두 결혼시킨 뒤 남편은 은퇴를 준비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작스레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전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어요, 30년 동안 아무 소리 없다가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얘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노후대책도 다 되어 있는데,,,”
“당신만 편했지 나는 안 편했어요, 얘들 학교 학원도 혼자 보냈고, 결혼 준비도 다 혼자 했어요, 난 30년 동안 이집 식모였어요.”
나는 놀았어 그럼? 밖에서 뼈 빠지게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 고생을 했는데.
당신이 돈 벌어온 거 말고 나한테 해준게 뭐 있어요,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길 했어, 감기 걸렸을 때 약 한번 사다준 적이 있어,,나도 이제 여자로 사랑받고 살고 싶어요.
다 늙어서 무슨 사랑 타령이야, 다른 집 남자들은 뭐 그리 잘났어? 아님 딴 사람이라도 생겨서 이래?
이런식이죠, 당신. 30년동안 이랬어요,.
가족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참 많은 것을 희생했던 두 사람. 정작 자신들의 마음은 너무 오래, 깊이 메말라 있었나 봅니다. 서로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며 울어본 게 얼마만인지, 공감을 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IMF 명예 퇴직, 경제 위기를 거치며 억척스레 버텨왔던 회사원 남편과 입시 경쟁과 사교육 지옥, 빠듯한 살림 속에 두 아이를 키우고 결혼시키느라 여자이길 진작에 포기했었던 아내.
남편은 30년 동안 동호 엄마로 산 아내가 이제 와서 여자로 살고 싶다는 걸 이해 못합니다.아내는 30년 동안이나 자신을 외롭게, 억척스럽게 내버려둔 남편을 이제 이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미안한 감정이 없는지를 물었을때 남편의 표정에는 후회와 죄책감, 다소의 억울함등이 보였습니다.
“있지,,,있는데,,,이제 와서 어떡해,,,”
누구의 잘못일까요, 혹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걸까요.
이런 부부들은 모진 말 한마디로 지옥이 되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모든 미움이 눈처럼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참. 너무나 어렵습니다.
나도 힘들었는데, 노력했는데 그걸 몰라주는 거 같고, 섭섭함, 미움, 원망이 들어 입가를 맴돌던 화해의 말들은 굳게 다문 입속에 희미해져버립니다.
두 분은 2주에 한번 병원으로 와서 1시간씩 부부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정말 많이 울었고, 남편은 혼나는 아이처럼,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불편했지만, 조금씩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5번째 상담시간.
저는 남편에게 가장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산책해 보고 싶어,,,윤중로,,저 사람 처녀였을 적 둘이 갔었던,,,”
의외에 말에 아내는 적잖이 놀라는 듯 했습니다.
이 부부의 이혼을 막을 힘은 제게 없습니다. 상담이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5번째 상담이 끝나고 진료실 문을 나설 때 남편은 아내의 팔을 가볍게 잡았고 아내는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부부의 표정엔 외로움과 고통이 자리했지만, 작은 구석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을 저는 본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듯도 했습니다.
아픔을 함께 이겨내려고 하는 두 사람에게 그저 아주 약간의 너그러움과 오래된 애정이 함께 하기를. 그리고 그것이 두사람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허락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