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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박종석 Mar 31. 2017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환자들 상담도, 부모님 뒷바라지도, 오지랖 넓게 친구들 고민 들어주는 것도 

너무 지쳐서 혼자 훌쩍 다녀왔다. 

거의 1년 만인 거 같다. 술 마시고 폭식하고 드라마를 끝도 없이 보고 카지노에서 돈을 썼다. 

이러한 reckless behavior는 일종의 자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내가 일 년에 한 번씩 이러는 건 

정기적인 분노의 배설인 거 같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 고민과 분노를 받아주기엔 경제적, 정서적으로 나보다 

훨씬 불안하고 연약하다고 느꼈다.


여자 친구가 있을 땐 나를 나약하게 볼까 두려워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은 결혼과 양육으로 정신이 없어 얘기를 꺼낼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고민을 저렇게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분노를 털어내고 다시 누군가의 좋은 의사로, 부모님의 듬직한 아들로, 

언제나 여유 있는 좋은 친구로 돌아와야 했기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결혼한 사람들이 부러웠고 애인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평일 저녁을 같이 먹으며 나 오늘 힘들었었다고 피곤했다고, 시시콜콜한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소한 일로 짜증내고 싶었고, 말도 안 되는 장난이나 농담도 하고 싶었으며, 

점잖은 척 착한 척 그만하고 까불거리고 싶었다. 누군가는 나의 멀쩡하고 괜찮아 보이는 껍데기 안에 

외롭고 나약함이 있음을 알아봐 주길 원했었다.


큰 깨달음이나 성숙함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보여주는 사소한 관심이나 

안부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부자 부모를 둔 친구를 이제는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친구의 애인이 너무 예쁘다고 해서 

내가 쟤보다 못난 게 뭔데라며 구시렁대지도 않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그들에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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