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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Dec 11. 2020

배금(拜金)시대 속의 삶

르상티망과 인지부조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점점 더더욱 숫자로 환산하기 쉬워짐에 따라, 인류문명의 모든 척도는 돈(金)으로 귀결이 되어간다. 지구 상에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그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게 되어 간다. 당신의 키, 당시의 외모, 당신의 애완견, 당신의 집,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예절과 교양, 그리고 가치관까지 돈으로 환산할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으며 등급을 매기고 순서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흔하디 흔한 보험회사들을 보라, 사고가 났을 때 신체의 각 부위별로 보상받을 수 있는 금액이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도 효율적으로 책정되지 않는가. 하루하루 끊임없이 벌어지는 법정의 소송들을 보라, 그 누구의 억지나 능청으로도 침범당하지 않도록 배상과 보상의 금액들을 논리적으로 구분해놓지 않았는가. 정신병원과 심리치료센터들의 치료과정들을 들여다보라, 팔과 다리가 아닌 마음과 정신의 통증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정해진 비용을 내고 치료를 받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물론 돈이라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겠고 효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 로마서 2장 8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즉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세상의 것을 우선시하기만 하고, 보편적이며 정의로운 가치관을 짓밟는 짓을 하면 나중에 신에게 혼난다는 뜻인데, 사람이 모이게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정련된 생각들이 형성될 수 있고 강한 힘을 가진 행동양식의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효율이 되고 편리가 되며 이후 이익이 생기고 권력이 되는 것인데 그 항로의 종착역은 결국 따지고 보면 '돈'이라는 척도로 귀결된다. 아마도 신은 이러한 배금주의의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미리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살지 말라고 훈계를 하신 듯하지만, 그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신이 인간을 그렇게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뜻도 되니 이 어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유명 정치가, 연예인, 가족, 연인, 선생님, 목사님, 멘토, 친구, 동료들 모두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과연 그럴까. 인생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왜 유명 정치인들은 재산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유명 연예인들은 일반인이 벌기 힘든 천문학적인 돈을 벌면서 왜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친한 친구나 가족들은 하루하루 힘겹게 일상을 살아가며 어떻게든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왜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조언하는 것일까. 자신 스스로는 돈을 어떻게든 끌어 모으려 하고 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왜 타인에게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혹시 그것이 돈에 대한 인간의 언어나 자세일까. 이러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견주어볼 때,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의 귀에 그러한 말들은 오히려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되도록 만들면 안 된다'라는 하소연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돈이 인생의 최고 지향점이지만 나는 그만큼 돈이 없으니 돈은 인생의 전부가 되면 그만큼 가지지 못한 내가 괴롭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니체는 이러한 인간의 행동양식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원래는 '원한'이나 '적개심'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니체가 설명한 주장의 맥락을 고려할 때, '못 가진 자가 가진 자에 대하여 갖고 있는 시기심이나 질투'라는 뜻이 매우 적절해 보인다. 사실 시기심이나 질투, 원한, 증오 같은 것들은 인간 고유의 본성이기는 한데 그러한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크게 작용하지 않고 언제나 인간 각자의 일상과 가치관, 희망, 그리고 자존감 같은 것들과 맞물려서 발현된다. 그리고 그러한 발현 속에서 르상티망은 색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여우와 신포도 이론'에서 그것을 간단하게 고려해볼 수 있다. 길을 걸어가던 여우가 높은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보고 힘껏 뛰어서 그 포도를 먹으려고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인하여 먹을 수 없게 되자, 신 맛이 나는 변변찮은 포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는 그 우화 말이다. 즉, 포도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라는 '태도'는 변경할 수가 없으니, 애당초 저 포도가 맛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맛이 없는 신포도일 것이라는 '인식'으로 쉽게 변경해버리는 것이다. 태도는 변경이 불가하지만 인식은 변경이 쉽다는 것이므로 '태도'나 '행동'이 아닌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라는 괴로운 감정을 해소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시기심이나 질투, 원한과 같은 감정들은 항상 탈출구를 필요로 한다는 뜻도 된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여건'과 '인식' 사이의 간극을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명명한다. 물리적인 행동이나 상황, 또는 태도 같은 것들을 인식이나 신념, 가치관이 따라가지 못할 때 생기는 차이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수험생들의 시험에서도 그렇고, 각종 운동경기, 승진, 영업실적, 연애 고백 등등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상황들이 알고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역사의 순간들이기도 하다. '내가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때 생기는 좌절감을 회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자기 방어의 인식.' 인간이라는 동물의 인식은 사실 그러한 방어기작 없이는 역사를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딛고 일어선 현 과학문명 앞에서 그 누가 실패의  책임들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심리가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와 맞물려 돌아간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대부분 사유와 인식의 뿌리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만 찾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 각각의 고유한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고, 그러한 정당성은 공동선이나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 없이 제멋대로 형성되어 각자의 인식을 지배하게 될 것이 뻔하다. 열심히 일을 하고 살았음에도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보다 가난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의 요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을 것이다. 타인을 불법적으로 돈을 모은 사람으로 인식해야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며, 타인을 금수저나 로또를 맞은 사람으로 인식해야 자신의 가난이 합리화될 것이다. 반대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보다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부자인 사람들도 부의 요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을 것이다. 타인을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해진 사람으로 인식해야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며, 타인을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인식해야 자신의 부가 합리화될 것이다. 


  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인 니체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파고들어, 기독교의 허례허식을 꼬집기도 하였다. 부자가 되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라든지 가난한 사람일수록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는 말들이 사실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있지만 이러한 것들도 르상티망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인들이 외쳐대는 구호나 포퓰리즘 또한 르상티망의 교묘한 심리를 파고들고 있기도 하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회 극소수의 엘리트들을 비난하고 경멸함으로써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의 동조를 얻고 혁명을 이루고자 하려는 것이 전형적인 방법이었을텐데, 역사적으로 보면 주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 대부분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것은 인간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고유의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유명 연예인들의 오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공개적으로 들추어내고 비난하는 과정에서 해소와 쾌감을 얻는 군소 집단들도 모두 르상티망과 인지부조화의 장치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자, 이렇게 이현령비현령이 지배하는 광란의 시대에서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포도를 먹고 싶었던 여우는 쉽게 체념하며 포도가 상했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고, 성격이 다른 여우는 어떻게든 높은 나무를 오르기 위해 노력해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지부조화를 겪으면서 정신승리를 하면서 사는 것도 본인 스스로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고,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노력하고 개선하며 성취감을 이루는 것도 행복의 한 종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지구촌이 하나의 네트로 이어지고, 클릭만 하면 나와 같은 조건의 모든 사람과 가정과 생활이 비교되고 공유되는 시대에 자기 자신의 철저한 가치기준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쪽으로 눈을 돌리면, 하룻밤 사이에도 몇억씩 집값이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으로 눈을 돌리면 각박한 시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보인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서 선별되고 선택받은 소수의 엘리트들만 보게 되지만, 사실 수많은 연습생들이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알 수도 없는 고생을 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이 세계는 링이 없는 격투장이 된 지 오래고, 누가 심판인지 알 수도 없다. 본인 스스로 자기만의 위치와 한계를 정하고 그 안에서 성취와 행복이라는 센서를 찾아내어 느끼고 즐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보다 한 없이 운이 좋고 부유한 사람만 쳐다보면서 살게 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지며 부러움과 실망감이 교차하는 번뇌 속에서 살 지도 모른다. 나보다 운이 없고 가난한 사람만 쳐다보면서 살게 되면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과 걱정으로 살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물질은 끊임없이 당신을 유혹한다. 세상의 고통은 끊임없이 당신을 멸시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지 않는 이상 당신은 비교와 저울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가. 어느 것이 나의 마음이고 어느 것이 타인의 마음인가. 과연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과연 어떠한 존재일까...


  나다니엘 호손의 조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본다.



Happiness is a butterfly, which when pursued, is always just beyond your grasp, but which, if you will sit down quietly, may alight upon you.
행복은 나비와 같다. 다가가려 하면 언제나 당신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하지만 당신이 차분하게 앉아있다면, 아마도 당신에게 살며시 다가올 것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2020년 겨울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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