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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Dec 30. 2020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기억

  쓰고 보니 제목이 거창하나 내용은 우습고 어린애 같은 기억의 일종인데, 아마도 86년 87년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외대와 경희대의 정확히 중간지점에 위치한 회기동에 살고 있었다. 국민학교 4~5학년이었던 시기였으니 어린아이들의 기억으로는 사과탄이나 최루탄의 매콤한 고통만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르는 원초적인 기억의 일종이다. 


  대가족인 우리 집은 식구가 여러 명이었는데, 그 당시 이모가 주식으로 200만원인가 벌었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이모가 한턱 쏜다고 해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켜 먹었는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누가 봐도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배달을 왔더랬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이 밝은 회색 자켓을 입었었고 바지는 청바지에 얼굴은 다부지고 거무튀튀하면서도 약간 붉은색을 띤 그냥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자켓을 입었던 것을 떠올리면 민주항쟁의 한가운데였던 6월은 아니었던 것 같고, 늦가을이나 이른 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99.9% 빚쟁이들만 가득하던 그 어려운 시기에,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던 탕수육을 시켜먹었으니, 그 날 배달하러 온 이름 모를 타인의 방문에 얼마나 어리둥절했던가. 특히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기억하는 나의 습성상 그 형님은 마치 우리 집에 선물을 가지고 온 중국집 산타처럼 보였고 음식값을 받아 든 청년의 상기된 얼굴에서 어떠한 이름 모를 삶의 열정과 피가 뒤섞인 묘한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아마 하루 이틀이나 흘렀을까. 집에서 문만 열면 회기동 대로가 한눈에 보이는 집안 구조의 특성상 하릴없이 대문 밖을 두리번거리면서 보다 보니, 오늘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학생들이 줄지어 데모를 하고 매운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찌를 듯하여 나는 어디 오락실에나 가서 처박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오락실 주인아저씨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 남아있던 아이들에게 데모가 끝날 때까지 공짜로 계속 오락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생들의 대열은 끝이 없었고 아마도 나의 생각으로는 경희대와 외대 학생들이 전부 거리로 뛰쳐나온 것 같은 거대함을 느꼈는데, 나는 그때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이 저렇게 많이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면, 마치 커다란 북이 깊고 넓고 무거운 음을 내는 것처럼 힘이 있고 주술적이고 무서운 효과를 낸다는 것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오락실로 가던 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그냥 멈추어 있었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대로변을 뛰어가던 수천 명의 학생들의 물결을 그냥 입만 벌리고 바라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 익은 사람이 한 명 그중에 섞여 있던 것을 본 나는, 금세 그 사람이 바로 엊그제 우리 집에 탕수육을 배달해주었던 청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동일한 옷차림에 동일하게 상기된 얼굴, 그리고 동일하게 혈기 있는 표정으로 옆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를 모를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국민학생이 알기 힘든, 어려운 한자어 8개를 반복해서 외쳐대면서 진행하던 그 무리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 그 언어를 집어삼켰고, 의식적으로 반복해서 기억했기 때문인지 그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중얼중얼 외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 호헌철폐 독재타도....'


  어느 날 집에서 가족들에게 그 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밖에서 데모하는 거 구경하지 말고 어디 가서도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라고 무참히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이야 뭐 줄기차게 그런 식으로 계속 데모를 하던 시기였으니 그냥 그러나 보다... 하고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이 나의 의식에 잠재적으로 박혀있었던 것인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일하게, 6월 민주항쟁의 아주 작은 필름의 한 컷을 간직하고 있다는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우리 집에 탕수육 배달을 하러 온 날도 독재정권의 불의를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억누를 수 없었던 그 중국집 산타는 어느 대학교 학생이었을까. 새롭게 맞이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면서, 그분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2020.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한겨울에 꺼내어본 기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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