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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y 06. 2021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방법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또 끄집어내야 하는데... 평소 좋아하던 것과 싫어하던 것으로 나의 기호를 나누어 구분해볼 때, 유난히 관심도 두지 않았고 오히려 싫어하기까지 했던 것들이 확실하게 몇 가지 기억에 있다. 돼지비계와 생선 비늘, 닭껍질, 당근, 소음, 크레파스 냄새, 탐구생활, 가족들의 싸움, 그리고 책이다. 그중에서 책이라고 하면 어릴 때의 동화책부터 시작해서, 중고등 교과서의 한국문학과 기타 여러 가지의 소설 같은 것들이었다. 꼬리아홉달린 여우라든지 도깨비 같은 것들이 나오는 동화책처럼 그림이 많고 글자 수가 적은 책들조차 쳐다보기가 싫었고, 도대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진저리를 치면서 1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정지용의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학생이 그것을 왜 외우고 시험을 봐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라는 것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기에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국어라는 과목에 증오심까지 생겨버렸던 것 같다. 순수하게 자연계열 학생이었고 전자오락과 전자오락, 그리고 또 전자오락에 빠져버린 천생 이과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이라는 것은 그 본질이 필연이었던 것인지 고등학교 시절 집 안에 누가 사놓고 처박아둔 것인지도 모를 '현진건의 무영탑'이라는 소설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나는 그것을 왜 집어 들게 되었을까? 정말 처절하게 그날 아무 할 일이 없었다던지 혹은 마땅한 TV 방송도 없었다던가 아니면 아무 친구도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뭐 어쨌건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에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집어 들어 읽었던 책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때 내가 그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 아사녀가 무사히 아사달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이 되어있던 것인데, 착하고 순종적인 한국 현모양처의 상징이 주변의 장애물과 난관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던 것 때문이었을게다. 그것은 나에게 완전한 낭만소설이었으며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과도 같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야기라는 것, 소설이라는 것의 자석 같은 힘을 느꼈으며 -비록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유치하기는 하지만- 아사녀가 비극을 맞이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경험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의 마중물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작은 그렇게 우연인듯하고도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본인이 자라온 환경, 보고 듣고자란 성장과정, 인간 개개인에 뿌리내린 각자의 정서와 의식구조가 한데 어우러져서 소설의 첫 경험과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렬한 인상을 느꼈던 첫 소설 정도는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현진건의 '무영탑'이었으며 운이 좋게도 나는 그 이후로 서서히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가게 되었다.


  처음 접한 작품이 무영탑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한(恨)'의 정서와 역사적 배경을 갖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교 때 접했던 '태백산맥'과 '아리랑'과 같은 조정래 선생의 작품들은 어느 집단이나 지역의 오랜 역사와 특성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주었던 것 같다. 건축공부를 하면서 접했던 이상과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공간적으로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접했던 톨스토이나 박경리, 빅토르 위고, 헤밍웨이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삶의 의미들을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소설이나 문학작품들을 찾아과는 과정은 유적 탐험과도 같은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무영탑이라는 작품이 완독이 되었으면, 그 외 비슷한 해쉬태그를 찾아서 김만중의 '구운몽'이나 김동인의 '감자', 혹은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작품으로 손이 가게 되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완독이 되었다면,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얻어들은 정보에 의탁하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가 그와 비슷한 분위기로 추천이 되었으며, 나는 또다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은 '설국'으로 이어지고, 또한 미시마 유키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이렇게 주요 코드나 주제를 따라서 인문학의 정글을 탐험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나와 같은 공학도들이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인문학을 경험하기에 아주 편리하다. 


  나는 최근에 김영하 작가로부터 파생된 즐거운 헤맴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된 알쓸신잡의 다채로운 주제들과 잡스러운 지식들은 지적인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고, 거기에 출연하였던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을 기점으로 하여 특히 서양 쪽의 감각적인 대가들의 명저들을 탐험하고 있는 중이다. 존 크라카우어나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세르반테스를 비롯해서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수잔 케인에 이르기까지 국경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행복하게 유영하고 있다.


  나처럼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의무적으로 좋은 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흥미로운 작가를 먼저 우연히(?) 발견하라고 말하고 싶다. 훌륭한 작가의 에피소드나 인생 이야기, 혹은 그로 인한 어떠한 이야기라도 먼저 자신의 인생과 궁합에 잘 맞는 부분이 본인 속으로 들어와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착화(着火) 된다. 그러한 작가와 만나는 통로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다. 문화적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좋은 작가를 만나는 방법은 점차 다양해지는 것 같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흥미진진한 경험을 제공해주며, 쉽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정신세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쾌감을 느끼게 되고, 이 세상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별나게 살아간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여러 작가의 훌륭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어휘가 다양해지고 문학적 표현의 스킬이 늘어나게 된다. 이는 마치 집에서 팔굽혀펴기만 해서 어깨만 넓히던 사람이 시설이 좋은 헬스장의 갖가지 운동기구를 경험하면서 스쿼트도 하고, 활배근도 키우고 심폐도 단련시키면서 전체적인 체형을 가꾸어 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인간의 의식을 언어로 표현하는 개수가 늘어나면 언어의 품질이 달라지고, 그것이 본인의 인격과 의식구조에 영향을 미쳐서 사고체계의 고품질 선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어떠한 상황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도 다양한 언어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유명한 옛 성현들의 성리학적 문장들을 읽다 보면 마치 신선이 이야기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서 거꾸로 증거들을 찾아가듯, 흥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발견하여 그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다양한 가지를 뻗칠 것이고 문학, 음악, 예술, 공학, 철학을 넘나들며 당신의 감각을 기분 좋게 해 줄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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