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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l 09. 2021

한국의 간판문화에 대한 소고

  건축설계를 전공한 건축학도로서 나는, 우리나라의 건축물들 외피에 들씌워진 간판들을 보면 내 전공의 비참한을 느낀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OECD를 가입한 1996년. 그때부터 지금까지 GDP도 늘고, 국가경쟁력도 늘고, 시민의식도 늘고,  코스피도 늘고, 민주화도 성장하였지만 이놈의 간판이라는 문화는 오히려 퇴행하는 것만 같다. 왜 그럴까.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가 상업시설과 각종 점포들이 들어찬 번화가나 유흥가가 보인다면 눈을 들어 건물의 외관을 유심히 쳐다보라. 사람이 들어가는 출입구, 사람이 숨을 쉬는 창문을 제외하고 건축물의 모든 표피가 형형색색의 간판으로 뒤덮여있는 꼴을 흔하게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아래층의 천정 라인부터 위층의 바닥 슬라브 라인까지 조금의 여백도 없이, 성실하게 간판으로 뒤덮인다. 그렇다고 그러한 간판들이 그 지역의 조례와 간판 디자인 방침, 경관지침에 의해서 통일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중구난방, 제멋대로 달라붙어있다. 건축물 자체의 외장재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 어느 날 꿈에서 봤던 전설의 무당집이 정확히 그러했을까.


  유독, 우리나라에서 간판이라는 것은 돈이고 상업이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오로지 돈이다. 가게를 차리거나, 체인점을 내거나, 지점을 만들면 무조건 수익을 내어야만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인지도를 높여야 하니 당연히 간판을 눈에 띄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소위 말하는 천민자본주의였던 것. 사회정의와 인문학은 선순환을 하면서 발전하는데, 오로지 그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만은 모든 국가적 성장의 크기와 정확히 반비례하면서 확장한다. 그것은 마치 운동을 열심히 하고 움직임이 많아지면 덩달아서 커지는 암세포와도 같다.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가 팽배하고 모든 권력이 돈으로 집중되면 이러한 현상이 생긴다. 사람의 기억도, 행복도, 가치도, 대의명분도 모두 돈보다 하위에 있는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돈을 우선시하고 달려든다. 돈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죽이는 시대, 결혼할 때에도 돈이 최우선시되는 시대, 인생의 최우선 목표도 돈이고 사람의 생명과 인생의 가치보다도 돈이 우선시 되면,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인간 스스로를 높이는 고귀함이 오염된다. 우상화된 돈 앞에는 문화도 없고, 예술도 없고, 교양도 없고, 맥락도 없고, 타인도 없고 관계성도 없고, 공동체 의식 같은 것도 없다. 2021년, 우리나라의 간판문화는 아직도 그 길을 걷고 있다.


  불과 100여 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근대화를 맞이하고, 식민시절, 분단, 군사독재, 민주화를 겪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하다 보니 국가적 졸부화가 진행된 느낌이다. 그 어떤 젊은이들이 이 표독스러운 건물의 외관을 보고 건축학을 배우고 싶어 할까.




  비단 간판뿐만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 나라의 문화 수준과 환경 수준은 한두 사람이 나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대중들이 만들고, 그 지역의 분위기가 그것을 끌고 가는 것이다. TV광고, 영화나 드라마, 사람들의 옷차림, 수많은 자동차의 전체적인 색감, 건축 외관 색상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러한 지표들이다.


  우리나라의 길거리 간판이 처한 상황은 현시대 대한민국의 슬픈 초상화이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자본주의의 폭발이라는 사건의 크나 큰 상처이다. 끝없이 색을 탐하고 종국에 피폐해지는 난봉꾼처럼, 오로지 돈과 물질만을 추구하다가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환자가 아닐까.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서 필요한 정도로만 돈을 추구하고, 그 나머지는 인간 고유의 가치와 삶의 본질적 의미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행복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하여야 한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내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여유롭고 사람 같은 건축물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카롭고 손을 대면 얼어버릴 것만 같은 건물이 아닌, 사람의 피부 같고 세월과 사람들의 역사가 느껴지고 온도가 살아있는 그러한 건물을 온전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격동의 역사를 겪은 우리들의 슬프고 비참한 초상이, 곧 상처를 회복하고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예절과 전통과 문화적 맥락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아름다운 의미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해보면서, 한 건축학도의 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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