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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l 02. 2022

슌킨이야기 / 다니자키 준이치로 / 1922

  우리가 흔히 관능과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는 일본문화의 한 부분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사람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의 근대화 변화 속 정점에서 활동한 작가이다. 즉 일본이 사무라이의 시대로 대변되는 전통의 시대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환골탈태하던 시기의 경계선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하여 매우 세련된 가학과 피학의 에로티시즘을 추구한 고전 기법의 선구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타 동양권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문화의 경우 개방된 성과 에로스의 풍속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일본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그들만의 문화를 구축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지진과 쓰나미의 자연재해,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느 곳으로 움직일 수도 없이 고립된 사회 규율. 그들은 닫힌 곳에서 최대한 분란 없이 지내야 했으며 필연적으로 엄격한 위계 체제와 권력을 필요로 했다. 정복된 권위와 암묵적 복종은 일본에서 태생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정당한 승부를 통해서 쟁취된 다이묘의 힘을 당연하게 인정하고 각 영토의 백성들이 집단적 명령을 따르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이익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는 상징이나 관념으로서의 왕이 아닌, 객관적으로 검증된 실체로서의 막강한 힘의 군주가 항상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목숨이 커다란 자연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흐트러지는 형상을 보면서 의지적 생에 대한 체념과 허무의 의식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 앞에 주어지는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전체를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유전자를 체득하였다. 즉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커다란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는 니힐의 의식은 인간 개개인의 인권이나 개인성보다는 다수나 전체를 위한 관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극도의 명상이라든지 에로스로 대변되는 고도의 쾌락으로 발전되어왔음이 읽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문화의 저변에는 에로티시즘이 아주 크고 강한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메이지 시대를 거친 일본문화를 에로그로난센스(EroGroNonsense)라고 표현하고는 하는데, 이는 모두 위에서 언급한 허무주의라든지 쾌락주의에 관계하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관능과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에로스(eros)'와 유혈이 낭자한 칼부림 혹은 악마적 자연재해의 참상을 연상케 하는 '그로테스크(grotesque)',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 무력화되는 '난센스(nonsense)'의식을 복합적으로 합친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 중에서 특히 에로스로 표현되는 부분에 천착한 작가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미화시키고 고도로 다듬고 세련화하여 자칫하면 저속한 쾌락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세계를 아주 고급스럽고도 섬세하고 단단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만들어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빛나는 여자의 등이 있다, 꽃잎 같은 여자의 발뒤꿈치가 있다. 문학사상 여자의 등이나 발이 이렇게 중대한 문제가 된 일은 없었다. 사람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시대적 변화와 한 여인의 발, 그 둘 중 어느 쪽이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지를 다니자키 문학은 반세기에 걸쳐 묻는다. 이 부조리한 물음의 중압을 느낄 때, 우리는 '예술'이라는 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시마 유키오)


  슌킨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작가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정점에 올라서 있는 상징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모든 작품을 거론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의 작품은 '여성'이라는 커다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짧은 작품 하나가 그의 정신의 모든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 


  관능적 외모의 기품을 가진 슌킨은 어려서부터 주위의 극찬을 받으며 자신의 재주를 키워가지만 결국 '실명'이라는 비극을 떠안고 살아간다. 이 고통은 그녀 속으로 파고들어 결국 기예의 경지를 끌어올린다. 그녀를 흠모하던 사환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그녀에게 헌신하게 되고, 그녀의 재능과 외모를 탐내던 주변여건은 결국 그녀에게 화상을 입히는 또 다른 비극을 던지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사환은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실명함으로 해서 영원히 슌킨의 아름다움을 품은 채 평생을 고통스러운 행복 속에서 살아간다. 


슌킨은 점점 기가 꺾여갔고 사스케는 이러한 슌킨을 보기가 애처로웠다. 하지만 슌킨을 가엾고 불쌍한 여자라 여길 수 없었다고 한다. 분명 맹인인 사스케는 현실의 눈을 감아버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로 넘어갔던 것이다...... 촉각의 세계를 매개로 관념의 슌킨만을 응시해온 사스케는 그 부족함을 청각으로 채웠던 것일까? 


    유독 우리나라에서 '한(恨)' 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이러한 정서는 왠지모르게 익숙하다. 그래서 슌킨이야기는 유난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다. 탐미주의의 극치가 고통과 비극으로 뒤섞인다는 점에서, 슌킨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과 서편제의 감동을 떠오르게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 중에서 유난히 '슌킨이야기' 라는 작품만은 얼핏 이청준 작가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일본문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매우 정교하게 균형 잡힌 고통의 극적인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슌킨 이야기의 핵심이다.


일본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사토 하루오가 말하기를 귀머거리는 우인처럼 보이고 맹인은 현인처럼 보인다고 했다. 왜냐하면 귀머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눈썹을 찡그리며 눈과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멍하니 위를 올려다봐서 어딘지 얼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맹인은 단정하게 앉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하니 자못 깊은 사색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부처와 보살의 눈, '자안시중생'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안'이라 하면 반쯤 감은 눈을 의미하니 그 모습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감은 눈에서 자비와 자애로움을 느끼며 때로는 두려움마저 품는 것이 아닐까? 


  슌킨 이야기는 여타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색채를 지닌다. 노골적인 감각과 본능을 재치 있게 묘사한 '미친 노인의 일기'라든지, 마치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 음산한 가부키 극을 한편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주 공비화', 심도 깊은 남녀 간의 애정 심리 묘사와 마치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치인의 사랑', 일본인들 특유의 자질구레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세밀한 감정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세설'에 이르기까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 자체를 보는 시각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현실적이고도 세밀하게 꺼내어 놓는 것을 표방했다. 하지만, 슌킨 이야기는 다르다. 그것은 절제되어 있고 고요하다. 무언가 가려져있고 비통한 장벽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소리 내지 않았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실명한 슌킨 대신 볼 수 있으며 침묵한 사스케 대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주요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적 편력과 성적인 지향성 이외에, 전반적인 서술의 기법이나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끌고 가는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예예찬' 이라는 작품을 읽어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1933년 발표된 일종의 산문집으로,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의 색채라든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아주 정교하고 명확하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때로는 과감하고 강한 어조를 쓰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정밀한 필치를 드러내어 설명하기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관통하는 분위기의 중심을 엿볼 수 있다느 점에서 소설 못지않은 명저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도기는 손을 대면 무겁고 차가우며 열을 빨리 전달하므로 뜨거운 것을 담기에 불편하고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지만, 칠기는 손에 닿는 감촉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귀를 자극할만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는 국그릇을 손에 들었을 때 손바닥이 받는 국물의 묵직한 감각과 뜨뜻미지근한 온기를 무엇보다 좋아한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의 보동보동한 육체를 떠받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지금도 국그릇으로 칠기가 쓰이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고, 도기로는 대체할 수가 없다. 첫째로 뚜껑을 열었을 때 도기라면 안에 있는 국물의 내용물이나 색이 전부 보이고 만다. 칠기 그릇의 이점은 먼저 뚜껑을 열어 입으로 가져갈 때까지, 그 사이 내내 어둡고 깊숙한 바닥 쪽에 용기의 색과 거의 다르지 않는 액체가 소리도 없이 가라앉아 있음을 바라보눈 순간의 기분이다. (음예예찬)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은 서양의 자연주의와 탐미주의가 동양식으로 변형된 독창적인 세계관이다. 그것은 하나의, 한국 특유의 정서와는 또 다른 독창적 산물로서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다. 노벨상의 반열에 오른 블라디미르 나보코브의 '롤리타'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사쓰코'가 풍기는 관능의 에로티시즘을 서로 비교하며 누려보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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