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사랑한 아일랜드의 천재 작가. 날카로운 위트와 유머, 현란한 문장력. 행복과 고통, 아름다움과 비극을 동전의 양면처럼 묘사하고 여러 가지 모순과 뒤틀림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악동. 그는 한평생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파고든 철저한 유미주의자였다.
그러한 성향 때문이었는지 그의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동화작품들에서 더욱 빛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하나씩 희생하는 행복한 왕자를 읽을 때면, 안데르센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 일종의 따스함과 차가움, 행복함과 고통스러움 사이에서 드러나는 비극 미학의 정수를 느끼게 된다.
미시마 유키오가 사숙(私淑)한 작가라고 알려진 그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특유의 악마적 언어유희와 동성애 스캔들로 인하여 한순간에 파국을 맞이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을 잘 설명해주는 명작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작품이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이 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작품 속에 말려들어가는 방식으로 소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가시투성이인 장미를 취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명석함이나 기교보다는, 슬픔을 내포한 아름다움의 극적인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아마도 허무하게 소비되었을 것이다. 화려하게 타오르다가 한순간에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그는 행복과 고통, 아름다움과 비극이 허무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에게는 예술이라는 양초가 쾌락이라는 심지로 소비되는 것과 같이 느껴졌을 것 같다.
난 소멸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걸 질투해요. 당신이 나를 보고 그린 이 초상화까지 질투한다고요. 어째서 내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속에 담겨있죠? 매 순간이 지날 때마다 내가 빼앗기는 그 어떤 것이 저 그림 속에는 담겨 있어요. 아, 만약 그 반대일 수만 있다면! 만약 저 그림이 변하고, 내가 항상 지금과 같을 수만 있다면!
이 작품은 20세기 초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미시마 유키오 등의 일본 탐미주의 소설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에로스와 난센스와 그로테스크로 대변되는 당시 일본문화는 개화를 맞이하면서 서양의 오스카 와일드를 초대하였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유미주의의 족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필수적이다. 특히 언어를 한번 꼬아서 그 반대의 성질을 드러내어, 비상식적이고 허탈한 웃음을 유발하는 '금각사' 같은 작품이라든지, 자신의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의 고통을 껴안고자 하였던 '슌킨이야기' 같은 작품들의 원류가 어디에서 말미암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새로우면서 동시에 유쾌하고 낭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생소함의 요소를 지닌 감각을 추구하는 한편, 그는 종종 자신의 천성과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던 사고방식을 채택했고, 그 미묘한 영향력에 자신을 내맡겨 그 색조를 포착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한 뒤에는 그것을 '기이한 무관심'으로 내버렸는데, 어떤 현대의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그러한 무관심은 실제 열정적인 기질과는 상반되지 않으며, 실제로도 열정적인 기질의 조건이 경우가 많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명석했고 방탕하였으며, 현란하였고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언어를 모방하고 싶어 하였고, 여인들은 그의 유머를 사랑하였다. 범상치 않은 눈빛, 눈에 띄게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 그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주목받았고 또 그만큼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인정받았고 미국에서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다르게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은 보수적인 지역이지 않았던가. 그는 수많은 소설과 동화와 희곡으로 유명인이 되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동성애 스캔들로 감옥생활을 하고 곧 이어 쓸쓸하게 사망한다. 그의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 속에 스스로 파묻혔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록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언어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형식적이고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숨은 정반대의 성질과 의식들을 발견하는 재주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성과, 눈을 감고 음미하게 만드는 감성을 현란하게 조율한다. 그는 예술가를 숨기고 예술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목표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 속에는 항상 예술작품이나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 이전에 고통스럽고 비극적으로 소멸되고 소비되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아름다움의 표본이지만, 그는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 고통스럽게 자신을 소모했다. 어쩌면 20여 년 전에 자허마조흐가 탄생시켰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우리는 소모적 비극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관점에 대한 전초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혁명과 개화, 변화와 발전, 고전주의와 신물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의 도가니 속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퇴폐적이지만 유혹적이고, 감각적이지만 아름다운 사상으로 커다란 문학사적 경계선을 그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야 하는 모든 직업에는 고귀한 무언가가 있다.
인생이란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들로 이루어진 고통스러운 한 때일 뿐이다.
재미있는 으레 옳지 않은 법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어린 아이나 별의 탄생에도 고통이 함께 한다.
대중성이라는 것은 세상이 보잘것없는 예술에 씌우는 월계관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양면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다룬다. 금기시되만 유혹적인 부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어리고 순수한 주인공은 환경과 주변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물살에 휩쓸린다. 선한 의지는 항상 사회적 규율과 외적인 제약에 의해서 다듬어지지만 아름답지 않다. 악마적 유혹은 사회적 제약을 거부하고 개인의 의지를 중요시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답다. 작가는 이 두 지평선 사이에서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독자는 3차원의 그래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저울질에서 자신의 경험과 의지와 시각으로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열의 기이하고 단단한 논리와, 정서적 색채를 띤 지식인의 삶에 주목해서, 그 두 가지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어느 지점에서 합쳐지고 또 어느 지점에서 알력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는 악동이다. 집단과 외부적인 제약을 거부하고, 개인적 쾌락과 소모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당시 가치관의 심판을 받았으나, 결국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00년이 지나서 그의 국가로부터 화해의 악수를 요청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재평가하였고, 묻혀있던 황홀한 필력들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세기와 20세기를 이어주는 경계선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행복한 왕자, 옥중기, 살로메 등의 작품들에서 그의 한결같은 집요함과 관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무료해지기 쉬운 6월, 문득 생각난 천재에 대해 잡담을 늘어놓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