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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pr 30. 2022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1942

L'Étranger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자녀 돌잔치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었어도 같은 회사 사람이니 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동료의 혼잣말이 들려온다. 코로나 탓인지, 아니면 시대 탓이었는지 최근 몇 년간 돌잔치라는 행사는 참 보기 드문 경우였으나 그래도 우리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사진 중앙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느 아이의 사진이 자리 잡고 있고, 하단 부분에 장소와 시간, 그리고 계좌번호가 적혀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같은 회사 내 사람이니 아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시간을 내지는 못할 것 같으니, 부조금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무언가 잘 들어맞지 않는 어떠한 부조리의 감정이 남는다. 돌잔치라는 것이 대개, 부족하고 가난하여 일찍 죽던 조선시대에 사람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후 1년간 살아남느라고 고생했다는 행사일진대, 화성 탐사를 하는 2020년대에도 그 전통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도 말 한번 나눠본 적도 없고,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을 타인의 자녀를 위해서? 내가 보기에 이제는 장인 장모 시댁 어르신들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잔치를 해야 하는 아이 부모들의 심정도 마뜩잖을 것이고, 익숙하지도 않은 그러한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 결혼하기도 싫고 아이도 갖기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 또한 어벙벙할 것이고, 게다가 당사자인 그 아이는 억지로 사진을 찍히고,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수많은 하객들을 쳐다보면서 졸린 눈과 짜증석인 울음을 터뜨리며 마이크니, 연필이니 하는 것들을 손으로 골라내야 하는 연극도 해야 하니 이것은 말 그대로 누구 하나 편안할 사람 없는 3중고의 겉치레 행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감정을 갖는 나 자신이 갑자기 뫼르소의 입장을 느꼈다면 이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게으른 자세인가. 이제는 가족끼리만 몇 명만 집안에서 모여, 갓난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덧붙이는 동료의 넋두리를 뒤로한 채 은행 앱으로 간단하게 부조금 계좌이체를 마친다.


  나같은 공학도가 카뮈를 이해하는 방식은 자못 흥미로웠다. 작가가 의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계획적이고 이기적이고 감각만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갑자기 지중해변 한가운데에 툭 던져놓고 종국에는 자기의 목숨조차 자신의 것으로 보지 않는 듯한 소시오패스적 일탈 행동에 대해, 독자로 하여금 마음껏 질타하게 한 다음, 며칠이 지난 후(혹은 책을 몇 번이라도 더 읽어본 후) 독자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그들만의 뫼르소를 심어 놓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장소와 시간 속에서 뫼르소 같은 이방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육체적 욕구가 감정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머니 장례식 날, 나는 너무 피곤해서 졸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방인'은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점점 친근해지고, 급기야 연민의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녔다. 이 사회와 관습과 고정관념이라는 커다란 굴레의 타성에 젖어있던 나의 불편함이라는 것은, 뫼르소라는 모난 돌 혹은 이빨이 빠진 톱니바퀴의 출현으로 흔들리고 진동한다. 어느새 그의 엉뚱함과 비도덕과 개인주의는, 눈에 보이는 목적 없이 커다란 목적에 쫓겨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었던 우리들 자신의 쓸쓸하고 고독한 표상을 마주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의 졸림은 우리의 피곤함이요, 그의 갈증은 우리의 욕망이었다. 그의 예의 없음은 우리가 누리고 싶은 자유였던 것일 수도 있고, 그의 솔직함은 몰개성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부대껴 살아가는 초라한 나의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과연 주인공이 추구하는 개인주의, 맛있는 밀크커피, 풍요한 바다와 육감의 여인, 그리고 달콤한 낮잠은 추구되어야 할 것임에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뜨거운 감자였을까. 과연 부조리란 무엇일까.


  한 때 '부조리'라는 것에 대해서 전쟁과 근대의 혁명, 학살과 민족주의 같은 외적인 맥락에서만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인간성의 상실이라든지, 집단으로 매도되는 개성의 몰락 같은 것. 하지만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계속 읽다 보면 카뮈가 말하고 싶은 부조리라는 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오히려 선량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이기심이 충만한 인간 내면의 감각과 욕망이, 이 세계와 사회에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간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도 주인공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솔직한 본능과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을 중요시했던 것. 결국 우리는 소설 '이방인'을 통해서, 작중 뫼르소와 뫼르소가 아닌 것들, 조르바와 조르바가 아닌 젊은 두목, 게츠비와 게츠비가 아닌 케러웨이, 본능과 현실의 감각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사회적 관계와 관습을 중요하시는 사람, 이를 테면 현실을 중요시하는 카르페디엠과 죽음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메멘토 모리 사이에 존재하는 어긋남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이 사회 체계의 고정관념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카뮈를 생각할 때 자주 떠오르는 코드들인 그 찬란한 태양. 눈부신 바다, 미소 짓는 대지, 굽은 만, 그리고 절망적으로 끌어안기라는 것. 수평선 뒤로 사라져 가는 노을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인간도 저렇게 눈부시게 짓밟히리라는 행복을 예감해본다. 그러므로 행복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상호 병치되는 부조리의 모순을 통해서 인간성을 드러내는가보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이나 고통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연소하고 소진하여 자신만의 보람과 성취를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산 꼭대기로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들어 올리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시지프의 천진난만함은, 무자비한 현실 속 쳇바퀴의 굴레 속에서도 웃으며 가족을 맞이하고 소박한 저녁식사 앞에서 소확행을 추구하는 성실한 현대일들에게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들은 시지프의 신화가 아닌, 허탈한 생존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각각의 신화 속 주인공들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부조리에 직면한다. 열심히 살았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며,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하고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사회의 체계와 구습의 굴레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의탁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문득 내가 왜 살아있나, 도대체 뭘 위해서 일을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번뜩일 때도 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최초의 우연. 그러한 우연의 또아리에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부조리한 인간 개개인의 숙명. 그리고 그러한 숙명 속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노력을 경주해야만 하는 일방적인 시간의 권력. 내가 이방인에서 받은 전체적인 감정은 '우연'과 '권력'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물론 이방인에서 그 권력은 태양이었지만.


내가 보기에 뫼르소는 표류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뿌리가 깊숙한 정열이 그에게 활력을 공급한다. 절대에 대한, 진실에 대한 정열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직 소극적인 진실로 존재한다는 진실, 느낀다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이 없이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을 '이방인' 속에서 읽는다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카뮈의 '이방인' 미국판 서문 중)


  과연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얽혀 사는 사회 구조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에게 그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도 내가 추구하는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목표이겠건만,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관습과 문화와 전통과 인간관계들 속에서 그 '자유'라는 것 자체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끊임없이 우리들은 홀로 나만의 요새와 쉘터를 찾아 떠나면서 이 현실과 이 사회와는 동떨어진 채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외딴 유토피아를 꿈에 그리며 소중한 나의 자아를 아끼면서 다듬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싶은 존재들이 아닌가.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마치 뫼르소의 부도덕함과 이기심과 예의없음 이라는 것들이, 그의 죄를 추궁하는 데에 배심원들이나 재판장이나 그 사회에 꼭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외딴 섬을 찾아 나만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들, 그것이 나의 외부와 현실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여러가지 인연과 관습의 실타래가 내 몸을 감사고 조금만 움직이려고 하면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답답함. 만약 내가 모든 줄을 끊어버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이라고 갈 수 있노라면, 마치 거기에서 나는 새로 태어난 존재처럼, 그 누구도 나를 연결짓지 않고, 아무도 나를 모른채, 어떠한 구속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 그렇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연결고리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누구 하나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어서 마치 내가 그 곳에서는 나의 감각과 본능과 실존의 더듬이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 곳에 홀로 동떨여저 나 자신이 오롯하게 독자적으로 드세워지는 그 순수의 시공간의 경험에 대한 욕구를 우리는 카뮈의 훌륭한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독백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섬 - 케르켈렌 군도 中)


  커다란 굴레의 쳇바퀴에서 잠시 발을 빼내어 유일하게 허락돼 나만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이 시대의 쓸쓸하고 순수하고 게으르며 동시에 자신에게 성실한 이 시대의 뫼르소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며 이 시대 명작의 소고를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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