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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13. 2022

침묵의 갈증

  실내 골프연습장을 근 1년간 다니고 있다. 실내 골프연습장은 사방이 밀폐되어 있고 타석이 매우 타이트하게 줄지어 있어서 실수로 스윙을 잘못하면 가끔은 근처 타석으로 공이 튕겨 날아가기도 할 정도로 앞뒤 타석이 가깝다. 그래서 내 앞뒤 사람이 전화라도 받거나, 혼잣말이라도 하거나, 혹은 레슨을 받는 경우 그 소리가 아주 잘 들리게 된다.


  몇 개월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있던 사람을 어제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연습장 타석이 30여 개 정도 되니, 그 사람을 바로 근처 타석에서 만날 확률은 거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이다. 그 사람은 남자이고 가끔 여자와 같이 올 때도 있다. 그런데 그 남자만 오는 경우 그가 바로 내 뒤나 앞 타석에 있을 때, 나는 내 연습에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욕설과 욕두문자를 감내해야 했다. 아이언을 휘두를 때마다, 드라이버를 휘두를 때마다, 그는 세상에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듯 혼잣말로 처절한 쌍욕과 구역질 나는 욕지거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람을 비탄에 빠뜨리고, 온몸에 오물을 퍼붓는 듯한 맹렬하고도 그악스러운 누설(陋說)이었다. 그 남자 옆에서 연습을 하는 동안, 나의 신체는 리듬을 찾기 힘들었고, 밸런스는 무너졌으며 정신도 오염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언어의 힘과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을 갖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에모토 마사루가 그의 저서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그토록 열성적으로 피력한 바로 그 언어의 영량력을 나 또한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남자가 어떠한 여인과 같이 오는 경우 - 그래서 그들이 나란히 앞뒤 타석에서 연습을 하는 경우, 그는 욕설을 내뱉지 않는다. 보아하니 연인 사이이거나 부부 사이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 여자를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여자 앞에서는 절대로 욕설을 내뱉지 않는다. 그 남자는 그 여자를 가끔 가르쳐 주기도 하고, 때로는 따로따로 나란히 서서 각자 연습을 하기도 하지만 그 여자가 근처에 있는 경우에는 아무런 욕설이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여자가 연습이 조금 일찍 끝나서 먼저 나간다든지 혹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는 여지없이 격한 욕설이 난무한다. 그 남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직장에서도 저러한 언어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족들이 있다면 가정 내에서는 어떻게 언어생활을 하고 살아갈까. 성장하는 동안 가정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골프 연습과 상관없이 그 남자와 같이 오는 여자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 여자는 남자의 본모습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만약 혹시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 남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용인하고 지내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욕설이 난무하는 대화에서 일상생활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데이트가 어떻게 가능한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최근 들어 연습장에 가는 날이면, 내 주변에 그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듯하다.


  평소 익숙하게 느끼고 살았던 가전 소음과 무심코 흘러나오던 TV 소리, 창 밖으로 들리는 온갖 자동차 소리, 이삿짐을 나르는 사다리차 소리들이 일제히 멈춘 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무언가 이 세상을 움직이던 것이 모두 멈추어버린 듯, 시계가 정지해버린 것 같은 고요함 말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조만간 앞으로 다시 들리게 될 소리와 사건에 긴장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게 된다. 막상 온갖 소음이 난무하고 있던 시간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으나, 바로 침묵이 시작될 때 인간은 의식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적당한 여백과 침묵을 동반하지 않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온갖 단어와 문장과 음절은 듣는 사람의 주의력을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1초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TV 예능 프로그램의 소음과, 오로지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궤변들, 온갖 삶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응축된 사람들의 비아냥거림, 무방비로 미디어에 노출된 학생들의 비속어와 욕설들을 무심코 듣고 있노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에너지가 소모되고, 뇌가 탈진하는 듯 힘이 빠진다. 이제는 공영 미디어가 아닌 유튜브나 SNS에서 각 개인들이 자유롭게 방송을 하는 시대라서 그런지 몰라도, 수십만 혹은 수백만명의 팔로워들을 거느리는 유명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언어의 천박함과 정서적 폭력성과 공포스러운 욕설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십만 명이 보고 있는 방송에서 보란 듯 말이다. 물론 이 시대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틀에 박히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성과 재미를 추구하고는 있지만, 막상 그러한 영상을 보고 난 후 잠시 고요가 찾아든 거실에 앉아서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언어폭력에 멍이 든 나의 뇌와 의식이 정화와 회복을 위하여 애면글면 숨고르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고는 한다.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음담패설을 일삼는  옆에 있기만 해도, 마치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뜨거운 불길을 마주하는  같아 본능적으로 멀리 떨어지려고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이 정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상황에 너무 자주 노출되어서  의식의 피부 두께가 점점 두꺼워지고 불길이  근처에 와도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가 되어간다면,  사람은 결코 불길이 없는 환경에서 제대로 지낼  없게 된다.


  의미 없는 소음은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비방과 조롱이 섞인 욕설은 우리를 오염시킨다. 때로는 여백이 없는 그 모든 언어들 또한 사람을 지치게 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침묵의 시간과 공간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평소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모든 소리들 속에서 본인도 모르는 피해를 입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암묵적으로 잠재적으로 당신에게 피해를 가한다. 그 흔적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의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자녀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은연중에 발휘될 수도 있다. 단어 하나하나, 뉘앙스 하나하나, 억양과 목소리톤, 제스처와 언어의 속도에서도 그 폐해가 발현될 것이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이 피곤한 소음의 시대에 곰곰이 곱씹어볼 만한 현자들의 조언을 되새기며, 오늘... 이 비 내리는 휴일, 나에게 허락된 단 몇 시간의 고요한 시간에 감사하면서 넋두리를 마친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산에는 꽃이 피네 / 류시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던 것은 몸이 말에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니라". (논어, 이인 / 공자)
말의 세계는 침묵의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말이 마음 놓고 문장들과 사상 속에서 멀리까지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밑에 드넓은 침묵이 펼쳐져있을 때뿐이다. 그 드넓은 침묵에게서 말은 자신이 드넓어지는 법을 배운다. 침묵은 말에게는 줄 타는 광대 밑에 펼쳐져있는 그물과도 같다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에베소서 5:3-4)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15:1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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