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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Nov 28. 202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쿤데라 / 1984

  그 누구보다도 삶의 무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작가. 당신은 가벼운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것이 좋습니까. 20세기 현대문명 속 인간의 실존을 관통하는 단어, 바로 그 '무게'라는 것. 카프카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방황, 기억, 그리고 회귀를 읊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체성은 마치 중력에 붙들린 사물처럼 위로 부양했다가 아래로 가라앉고를 반복하였다. 떠도는 유목민족과 정착의 농경민족, 확고한 전통관념과 대응의 모던 관념, 선택받고 못 박힌 예수와 버림받고 배회하는 사탄. 과연 당신은 무게에서 자유롭습니까.


  밀란 쿤데라의 이 문제작은 도발적인 질문과 기상천외한 작가적 시점으로 가히 현대 문학사의 기념비가 되었다. 마치 인형극을 스스로 조종하는 듯한 관점. 철학 에세이를 쓰는 듯한 필체. 소설과 현실 사이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작가의 방종. 그리고 그 방종이 만들어내는 고뇌와 조롱, 그리고 분석과 통찰은, 작가를 그리고 이 작품을 고유명사처럼 만들어버렸다.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단어는 작가를 떠나 이제 완전히 이 세상에 띄워진 하나의 불덩어리가 된 셈이다. 쿤데라 자신조차도 이 거대한 작품의 무게에 짓눌려 여타의 작품을 환하게 밝히지 못하였지 않은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질문과, 예수의 고귀한 죽음 같은 상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도입부는 이 소설 전체의 내용을 하나로 압축하여 낙인 찍음으로써 이 소설 자체에 상당한 무게를 부여한다. 과연 작가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얼핏 보면 가벼움을 추구하는 듯한 쿤데라의 도발은 내가 보기에, 단단한 무게를 딛고 올라서있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음과 동시에 이 소설을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평가하는 모든 것에서 무게를 느낀다. 작가는 현대 인류 문명사에 정말로 문제적인 무게를 던져놓은 것이다. 결국 인간은 무게라는 문제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꽃가루가 공기 속을 부유하면서 의도하지 않은 짝을 찾아 수정을 이루듯, 소설의 주인공은 우연이라는 확률로 만난다. 소설 속 여자는 무거움을 추구하고 남자은 가벼움을 추구한다.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무게의 요소에 우연이라는 차원이 섞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꼭 인간의 인생을 닮지 않았는가.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것, 어딘가에 고정시켜놓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주변의 바람에도 휩쓸림 없이 항상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인간에게 어떠한 관성적인 표상을 요구하는 것. 작가는 그것을 '키치(kitsch)'라 명명한다. 구호화된 전체 국가의 이념, 관습이 된 전통문화의 행사, 바람을 피우지 않고 배우자에게만 관심을 갖는 결혼생활, 부모를 공경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우리의 상식 같은 것들이 모두 무게에 못 박힌 키치가 된다. 그리하여 작가에게, 그리고 소설 속에서 키치는 무거운 것이 된다.


  반면, 관습적인 것에서 삐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 혹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돌출된 것 , 이를테면 사랑 없는 섹스, 다수의 동조를 뒤흔드는 반대의 질문, 정성스럽게 그려진 그림 위에 실수로 떨어진 물감, 제조공장에서 일어하는 기이한 실수, 거대한 것 속에 섞여 들어간 불순물, 우아한 소개팅 자리에서 삐져나오는 방귀소리, 독재와 전체를 부정하는 개인의 항거, 혹은 고귀한 유명인이 싸질러대는 똥 같은 것,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우연을 만드는 것 같은 것들은 반 키치, 즉 가벼운 것이 된다.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 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차원을 더 생각해보자.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범주 외에, 육체와 영혼이라는 반목의 구조를 더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무거움이 부정적이고 가벼움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육체가 무거운 것인가 영혼이 무거운 것인가. 게다가, 우연과 필연이라는 다른 차원의 접근까지 결부시켜보는 것은 어떠한가. 우연이 긍정적인 것인가, 혹은 필연이 긍정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연이 무거운 것인가 필연이 무거운 것인가. 내가 보기에 작가는 다중의 차원을 서로 교차시켜놓고, 중력이 위아래로 지배하는 지구 위에서 전후좌우의 개념들을 병치한 후 그것들이 중력장 속에서 어떻게 서로 조응하면서 맞부딛치는지 관찰하고 싶어 하는 듯하였다.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비단 테레자와 토마시의 사랑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문명  자체와 사물, 관념, 역사 같은 것이 모두  뛰어난 작가의 시선과 관찰에 포섭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과 의식 속에  무게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있을 것이다.


  점점 가볍고 가벼운 것을 추구하는 시대.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우주까지 날아가 다행성 생명체가 되고, 원하는 모든 방향으로 자신의 무게를 방사할 수 있게 되기를 추구하는 시대.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를 짓누르던 전통관념과 모럴의 굴레에서 우리 스스로를 해방하고 있으며, 끈적하고 늘어지던 관계를 건조시켜 또각또각 끊어내고 하나의 독립, 고유한 존재로서 부유하고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쓰는 휴대폰에서부터 시작해서, 자동차의 외형 디자인, 건축의 재료들, 사람을 만나는 방식, 대화하는 방법 같은 것들도 모두 가벼움을 추구하는 역사의 흐름 앞에서 균일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과연 쿤데라는 이러한 것들을 예상한 것일까.


  테레자와 토마시의 사랑이 결국 갈등하고 길항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처절하게 드러내고 끝내 묘비명의 네모 반듯한 무게로 닫힐 때, 나는 인간의 한없는 나약함과 쓸쓸함을 느꼈다. 마치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떠내려와 수정을 하듯, 하나의 신화처럼 테레자의 정착이 우연처럼 묘사되는 부분은 인간사 태초의 비극과 슬픔을 잉태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테제라를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서, 각자의 토마시로 살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테레자는 인간의 근본적 체험, 즉 영혼과 육체 간의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이 급작스럽게 드러난 상황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의 혼돈 속에서, 과연 내 인생의 무게는 무엇인지,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가치를 갖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답은 본인이 찾아야 한다. 얼핏 난해해 보이지만 스토리가 있어서 읽기가 쉬운 소설이므로 오히려 자신만의 독서가 추천되는 명작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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