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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10. 2023

월광 소나타 1악장 / 빌헬름 켐프

  베토벤의 피아노곡은 정교함으로 무장한 교과서이다. 그의 교향곡들은 마치 법학도의 논증처럼, 음계의 질서 정연함으로 완성된 체계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혹은 나처럼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음악 앞에 서면, 감동이 단계적으로 쌓이고 마음이 가다듬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의 줄지어 흐르는 듯한 물방울과도 다르고, 드뷔시의 섬세한 부드러움과도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한 걸음씩 강한 발돋움을 할 수 있는 친절한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월광소나타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백미 중의 백미로 손꼽는다. 이 작품의 명칭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작품번호 27-2 '월광(Moonlight)'이다. 그중 1악장은 여성이 쓴 편지글의 작고 또박또박한 필체를 연상케한다. 계단 바닥이 약간 푹신한 느낌이다. 걸을 때 힘주어 오르지 않아도 된다. 최대한 압축되고 정제된 비감(悲感), 그 슬픔의 덩어리가 끝내 터지지 않고 마치 열매처럼 고슬고슬 달려 있어서 바람이 부는 대로 은근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끝나면 흔들림도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음악은 즐기기 위한 것이라지만, 오히려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베토벤의 삶은 이 곡의 감동을 더욱 진하게 드러낸다. 점점 세상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난청의 공포를 계속 확인하고, 부인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 노력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가 들리지 않는 귀를 가지고 어떻게 이러한 명곡들을 탄생시켰는지는 미스터리이지만, 베토벤의 작품들은 어쩌면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리 올드만이 열연한 '불멸의 여인(Immortal Beloved)'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은 이 곡을 제대로 음미하기에 좋은 연출을 선사한다.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한 채 음악이라는 장벽을 넘어서고 싶어 했던 베토벤은, 약혼녀가 될 여인의 염탐(廉探) 앞에서 피아노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피아노 뚜껑을 내린 후, 그 위에 귀를 댄 채 건반을 가볍게 누르기 시작한다. 타건음(音)은 그의 귀에,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전달되며, 그는 마치 의원이 맥을 짚듯 음의 주파수를 찾아 진찰하는 듯하다. 그리고 발견하였다는 듯, 그는 마침내 눈을 감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훗날 이 명곡을 고요한 루체른 밤호수에 비친 달빛을 상징하는 '월광(Moonlight)소나타'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음악을 귀로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상징, 악기와 하나가 된다는 설정, 훔쳐보는 여인의 마음에 파고드는 은밀한 감동 같은 여러 요소를 하나의 장면에 녹여낸 이 연출은, 음악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명 연주자들이 즐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박하우스(Wilhelm Backhaus)와 켐프(Wilhelm Kempff)의 연주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른 연주자들에 대한 지식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은 꼭 그러한 정통파적인 연주를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감동적으로 들린다지만, 월광에서 감동을 찾는다면 비단 나이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LqW7A3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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