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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21. 2023

섬 / 장 그르니에 / 1933

  품격 있는 뉘앙스와 단정한 어조로 차분하게 서술하는 철학자. 카뮈의 정신적 멘토로 알려졌지만, 막상 본인은 은막의 뒤편에 조용히 앉아, 이 세상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그 모든 것을 모방 불가능한 자신만의 철학적 언어로 질서 정연하게 표현한다. 소설보다는 산문이나 에세이로 유명한 거장이지만 그의 일상 속에는 사물과 빛과 침묵 사이를 서서히 걸어가면서 걸러낸 그만의 명상과 시선이, 극도의 세밀함과 유연함이라는 문장으로 나지막하게 표현된다. 격조와 품위라는 음식이 민무늬 그릇에 담겼다. 맛은 아름다웠다.


  대부분의 프랑스 작가의 유명 에세이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수필이라는 장르로 치부되지 않는다. 단순한 일상의 해프닝이나 사건, 혹은 기록의 차원에서 한 단계 더 전진하여 삶을 이루는 갖가지 모양새를 작가 특유의 관점과 가치관으로 다양하게 음미한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들은 아마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서나 수필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나 같은 공학도나 동양적 수필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장을 선사한다. 독일 철학자들의 차갑고 정교한 글과도 다르고, 영미 작가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솔직한 글과도 다르다. 불과 3~4년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단순하고 얇은 책을, 어느 일정한 시간 - 보다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보다 깊은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였을 그 어떠한 시기들을 감내하고 나서 다시 읽게 되었을 때에는,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과 정경들이 하나둘씩 상상 속에 펼쳐지게 되고, 음악 같은 낱말과 어조 속에서 마치 나뭇잎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듯 나의 감성들을 어루만져 주면서, 감히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갖가지 상념과 현상이라는 화석을 슬그머니 땅 속에서 들추어내서 가지런하게 내 앞에 펼쳐 보인다. 이전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에 들러붙듯 숨겨져 있어서 알 수 없었던 그 감정. 기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슬픈 예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던 아이러니한 행복. 장 그르니에는 덧없이 사라지는 이 세상의 온갖 쾌락과 즐거움과 이 땅의 축복이 가지는 유한성에 대해서 기꺼이 찬양한 뒤 후회 없이 놓아주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물결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물결은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아갔다 하면서, 마치 든든한 밧줄로 바다 깊숙이 비끄러매 놓은 부표처럼 끝내는 나를 제자리에 그대로 남겨 놓는 것이었다. 그 같은 무감각 상태에서 헤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은근히 쾌감을 맛보면서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었던가? 전혀 아무것에도. 무엇이나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 결과가 없었다.


  고양이, 담배, 산책, 담장길, 빛, 지중해 같은 현실의 물질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의 언어는 그러한 사물을 만지고 걷고 영위하는 자의 내밀한 명상이자 찬미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이고 개인주의자이다. 그의 행복은 완전한 개인성 - 이를테면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군중 속에 익명적으로 내던져지거나 혹은 침묵으로 무장한 어떠한 작은 사원이라든지 애완동물의 사적이고 조용한 도약 같은 것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은 즐기다가 죽고 인간은 감탄하다가 죽는다고 했던가. 그르니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아름다음과 절망에 대하여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우리가 그의 찬양에서, 한계 지워진 인간의 불완전한 숙명과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본모습과 맞닿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행복과 그것이 갖는 허무의 이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힘을 가졌다. 



  번역의 기술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전 '섬'은 김화영 번역가에 의해서 국내 최초 소개되었다. 개정판이 나오면서 일부 수정된 부분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 생각들을 우리의 입맛대로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번역가의 치밀한 능력 때문이다. 특히 한글로 잘 번역된 카뮈의 서문을 읽다 보면, 하나의 단어, 한 부분의 어미가 어떻게 처리되는가에 따라서 문장이 갖는 구조적인 힘과 아우라, 그 지배력이 어떠한 분위기로 다가오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문학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명문으로 일컫어지며 오히려 이 책 보다 더 유명해저 버린 카뮈의 서문은 이 책을 감상하는데 절대적인 개론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섬'이라는 명상에 빠져들다 보면 제자의 헌사가 점점 명확하게 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언어의 아름다음과 사색의 즐거움에 빠져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다. 5년 10년, 20년이 지나서 읽을수록 도화지는 화려하게 채워지리라. 우리가 여행할 그 알 수 없는 섬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는 듯하다.



과연 이 책은 우리가 우리의 왕국으로 여기고 있던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우리의 젊은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섬'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그르니에는 그것들의 영원한 응취와 동시에 덧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곧 우리는 우리가 돌연히 느끼곤 했던 우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 카뮈의 서문 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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