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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Feb 23. 2023

일본 명단편선 시리즈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 / 총 10권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그럴싸하게 재정립되었다. 아시아에서 근현대를 주름잡은 독특한 이웃나라. 멀고도 가까운 그 열도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 단편이 총 10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다. 총 42명의 작가에 해당하는 단편작 127편이 실려있다. 수많은 번역가들의 노고가 돋보이는 참신하고 환영할만한 문집이다.


  이러한 전집의 등장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일본작가들의 단편들이 여러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여기저기 서로 교차 등장하면서 끊임없이 읽혀왔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일본 문인들의 작품은 사실 너무 많이 출간되어 이제는 식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 위주로 선별하여 상업논리보다는 일본 고유의 사소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담았다. 그것이 포인트이다. 인기나 흥미와는 별개이다.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전쟁 직후까지의 시간을 고려하였으니, 급변하던 시기의 격정적인 역사가 포함된다. 이는 사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이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허무'일 것이요,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일본문학의 저변을 흐르던 총체적인 정서는 '죽음'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진정 잉여인간의 시대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1편부터 10편까지 이어지는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호색의 미학을 전통으로 삼고, 그로테스크로 표현되는 기이함에 집착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견지할 수 없다는 운명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넌센스 기풍이 작품 저변에 짙게 드리워있다. 섬나라 특유의 고립과 폐쇄성. 그를 바탕으로 한 힘과 무력의 생존 논리. 그러한 권위 앞에 놓인 전체적인 복종의식. 또한, 인간을 한갓 고깃덩어리로 짓이겨 놓을 법한 거대한 자연재해의 횡포 앞에서 무력한 작가들은, 인간이라는 가엽고 나약한 존재를 그야말로 고요하게 응시하며 기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조와 사색 속에서 작가 특유의 분석력과 통찰,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탁월한 시선이 고도로 발달해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익숙해진 유명 일본 대가들의 대표작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들을 접하게 된 것에 오히려 기쁨을 느꼈다. 오래도록 앉아있던 자리에서, 하이쿠 한 편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곱씹고 음미하고 상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집에 실린 희귀한 단편들의 느릿하고 깊숙한 어조를 제대로 건져 올릴 수 있으리라. 특이할 것 없는 일상적 어투와 평범해 보이는 사건들로 무장한 일본 사소설의 진수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침묵과 여운을 촉매로 한다. 사무라이의 서슬 퍼런 칼날의 공포도 짧게 끝나는 서술어의 마침표 하나에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다. 잔인하도록 슬프고 통렬한 감정들은 외마디 외침의 대꾸없는 서술어에 집약된다.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 사이를 모두 채우고 있는 일본 근현대 문학의 필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비조로 남은 고바야시 다키지의 도발적이고도 직설적인 작품들, 허무라는 단어를 재정립하게 만들어준 사카구치 안고의 뜨거운 언어, 섬세한 필치로 감정의 극한을 펼친 시마자키 도손의-특히 '황혼' 같은 문장의 예리함, 히구치 이치요의 시처럼 섬세한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 이제는 완전한 팬이 되어버린 하야시 후미코의 명작도 여전히 나를 가슴 뛰게 하였다. 호리 다쓰오와 무로 사이세이, 우메자키 하루오, 구니키다 돗포 같은 작가들의 번뜩이는 작품들도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만개한 벚나무 숲 아래의 비밀은 지금도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독'이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이미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자신이 고독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비로소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아래로 무한의 허공이 고요히 차 있었습니다. 조용히 꽃이 떨어져 내립니다. 그뿐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비밀도 없었습니다. (만개한 벚나무 숲 아래 中 / 사카구치 안고)


  아쉬웠던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번역가가 죄다 달라붙었기 각기 다른 문체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 동화나 설화 주제에 내가 익숙하지 않았던 점. 전쟁의 이면보다 표면이 드러난다는 점. 뭐 그러한 것들이 있었지만, 문학사적인 큰 맥락이나 분위기로 보면 지금까지 흔하게 접해왔던 일본문학의 본류와 정체성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는 문집이라고 생각한다.


  공립 도서관에서 시민을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도서신청 시스템을 통해서 모두 도서관 측에서 구매해 주었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혜택을 누린 독서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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