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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05. 2023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 1942

  작렬하는 태양과 황량한 사막 사이에 내던져진 채 지표에 돌출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육체에 대한 실존적 고찰이다. 돌출된 육체는 물질감을 가진다. 거친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온도를 내포한다. 그러기에 감각으로 더듬어볼 수 있다. 그는 사막 위, 텅 빈 진공 속에서 갖가지 형상을 그리면서 유영한다. 그러므로 흔적의 윤곽을 남긴다. 심장이 고동치는 인간은 원초적으로 지질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는 의식도 가지고 있다.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 사이에 구분이 생긴다. 그 둘은 별개로 나뉜다. 물론 이어져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의 호흡이다. 끈으로 묶인 두 사람이 같이 뛴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 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는 줄은 끊어진다. 줄이 끊어지면 달리기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달리기는 바로 멈춘다. 그러면 그때! 바로 사유가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부조리한 상황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간의 실존문제를 부조리철학으로 파고들었던 카뮈의 친절한 해설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철학적 에세이는 우리에게 커다란 주제를 던진다. 인간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하는 그는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은 친절한 철학교사의 역할을 떠맡는다. 상징과 단언과 찬미로 가득한 작가 특유의 문체 때문에 그의 그림은 여간해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 노력, 성실함, 노파심, 혹은 어쩌면 훈계에 가까울 수도 있는 열광적 수업을 듣고 나면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을 기만하는 막연한 '희망'보다는, 자신의 육체를 느낄 수 있는 현실적 '절망'을 사랑하라는 것. 그리하여 부조리한 사막에서라도 '절망적'으로 행복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올가미는 시간이다.  그것은 일종의 연극무대와도 같다. 정해진 순서대로 계획된 지점에서 나올 것이 나오고 들어갈 것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텅 빈 객석을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사색하고 반성할 때 무대의 시간은 멈춘다. 이내 곧, 개인의 불규칙한 시간이 찾아온다. 허무와 공허가 그의 의식을 감싸고 타인의 역할을 연기하였던 자신의 내면에 커다란 균열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 순간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부조리의 순간 속에서, 그는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그리고 또 그다음에 상영될 연기를 위해서 다시 자신을 돌아보고 절망하고 반항하면서, 다시 몸을 일으킨다. 그는 열정이 있는 것이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알고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부조리와 비합리가 난무하는가. 삶은 성실한 자의 순결을 용인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의 희망을 보상하지 않는다. 인간이 서로 얼굴을 맞댈 필요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의 철학이란 대화와 공감이 아닌, 증오와 증명이다. 극도의 배금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성의 상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성공'이라는 가치로 도치시켜 놓는다. 부와 명예의 장치를 갖춘 무대에서 내려오기가 싫은 것이다. 부조리는 필요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은 부조리의 자양분으로 부터 시작될 수 있다.


  카뮈의 에세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글에서 풍겨오는 뜨거운 온도 때문이다. 흙더미로 뒤덮인 시지프의 손바닥이 무거운 돌을 밀어 올릴 때 퍼지는 심장과 피의 열기는, 하루하루 자신만의 모든 에너지를 감내하고 소진하면서 극진하게 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진종일 쏟아낸 에너지가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나약하고 미련한 인간실존의 근본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때, 카뮈는 우리의 시선을 저 고상한 첨탑 위 근사하게 조각된 선지자들의 기품 있는 조형물 쪽에서, 불규칙하고 거칠거칠하면서도 뜨거운 나의 손과 발, 땀이 서린 어깨와 이글거리는 눈동자 쪽으로 되돌려 놓고야 마는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결국 시지프 신화는, 무반성한 습관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비합리적인 침묵으로 일관한 사막 한가운데에 섰을 때 돌연하게 느끼는 명철한 의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 시점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행위, 즉 그 사막에서 빠져나오거나(자살 혹은 종교), 버티고 서있기(열정, 반항)라는 구별을 통하여 카뮈는 자신의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고뇌를 찬미한다. 정상으로 밀어 올린 돌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때 보이는 현실의 무심함(부조리) 속에서 시지프는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발 끝을 응시하고(의식), 다시 기꺼이 형벌을 감내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가득 채운 채 산 아래로 내려간다(열정, 반항). 시지프는 결국 산 정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지도, 신에게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유다. 행복하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 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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