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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Sep 03. 2023

교권추락의 근본원인

2023년 9월 3일, 학부모 민원스트레스로 인하여 교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것은 이 나라의 교육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비극적인 현상이다.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중지시키고 청진기를 들이대지 않으면 이 슬픔의 연쇄는 끝나지 않는다. 올해들어 교사들이 자신의 생을 내던져가면서까지 온몸으로 통곡하는 것은 종양이 썩을 대로 썩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육문화의 오래된 고름이 이제 완전히 염증으로 생명을 좀먹는다. 처참하여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 월권의 씨앗

내가 이 기묘한 현상의 기운을 느낀 것은 9년 전이었다. 우리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던 그 늦봄. 학교에서는 난데없이 운동회에 부모가 참석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더랬다. 유치원 때에도 그렇고, 초등학교 입학을 해서도 항상 나는 카메라를 둘러매고, 운동회나 학예회에 참여하여 사진을 찍어주고는 했는데, 어는 순간부터는 학부모가 참여할 수 없는 운동회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들의 아이들이 달리기에서 1등 이외로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정서를 줄 수 있다고 하여 그러한 운동 자체를 금지요청했다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면 모든 부모들이 와서 그러한 것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항의했다는 이유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공교육의 산실인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서 그렇게 급작스럽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분명히 비상식적인 민원이 있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때 부터 이 나라의 가족구조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핵가족화 같은 단순한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 내 자녀가 오로지 1등이나 주인공으로만 커야한다는 이기주의

이후 나는 딸아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쳐가는 동안 이 나라의 교육현실이 어떠한 양상을 띠어가는지 아주 자세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학예회를 한다든지 혹은 교회에서 연극을 할 때에도, 그리고 그 어떠한 운동회나 체력검사 같은 것을 진행할 때에도 자신의 아이가 어떠한 순위가 정해져서 다른 아이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것을 거부하는 학부모가 많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자신의 자녀가 달리가를 조금 못하기만 해도, 달리기 참여를 시키지 않는다. 음악시간 학우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자녀라면, 학교에 전화하여 우리 아이는 따로 개인적으로 불러서 발성테스트를 해달라고 한다든지 혹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이용해서 혼성연주를 해야하는 경우에도 우리 아이가 보조같은 느낌이 든다거나 혹은 가운데 서지 않고 사이드에 서게되는 것도 부모가 하나하나 코치해서 선생님에게 따지고 불만을 보인다는 것도, 우리 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때부터 우리나라 교육문화가 극단적 이기주의와 결합하여 돌연변이화 된다는 것을 느꼈다.


◼︎ 아이의 교육은 부모가 책임진다. 교사는 생기부나 챙겨주면 되는 일?

이러한 학부모들의 자기자식을 극진히 드높이고 싶어하는 극단적 이기주의는 서서히 선생님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시시때때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교실에서 잠을 자도 선생님들은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한다. 타이름은 이제 성장하는 아이들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훈계가 아니다. 가해와 불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가 시끄럽게 떠들고 선생님에게 대들어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나무라거나 혼을 내기라도 한다면, 자기자식에게 싫은 소리를 한 교사를, 학부모가 찾아가서 비상식적으로 클레임을 건다는 것이다. 수년간 공부해서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드디어 교육의 뜻을 펼칠 준비가 된 공무원의 권리는, 내 아이가 무조건 남들보다 뛰어나게 보여야 하고 남들보다 우수하게 보여야 한다는 광적인 이기주의에 대항할 힘을 얻지 못하고 단칼에 무너져버린다. 왜냐하면, 교사는 생계를 바탕으로 한 당사자이고, 학부모는 학생의 뒤에 있는 배후조종자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월급을 받고 일을 하려면 주인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전에는 말을 듣지 않고 교실에서 방해가 되는 학생들을 훈계하고 나무라면 학부모가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 자식을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어디 선생작자가 우리 귀한 자식에게 이상한 말을 하느냐'며 툭하면 삿대질이다. 경제와 IT, 예술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정서와 인식, 문화와 교양은 천박하게 되돌아간다. 


◼︎ 책임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선생님들

선생님들은 이러한 고통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다. 면책특권이나 어떠한 권리, 혹은 그러한 것을 모두 보상하도고 남을 급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괜히 학생에게 싫은 소리 한번 했다가 학부모에게 클레임이 걸리면, 하루종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든지 혹은 학부모에게 협박을 바는다든지, 심하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기도 해야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생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잠을 자건 말건, 시끄럽게 떠들건말건, 장난을 치건 말건, 선생님을 희롱하건 말건 선생님들은 그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꾹 참아내고 버텨야 한다. 그러면 그 시간이 지나간다. 오늘 하루, 이번 한달, 올해 무사히 보내었다면 1년 생계와 교육의 꿈을 해결한 것이다. 30년만 더 버티면 학교에서 짤리지 않고 살 수 있다. 이 더럽고 치사한 교사생활도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한다. 그것이 싫다면 선생직업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도 안된다면 탈출구가 없다. 최근들어 선생님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여기에 기인한다.




◼︎ 원인

물질만능주의가 가장 큰 원인이다. 돈이 많으면 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 사람의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 재산을 20억 30억 가진 사람은 사람목숨이 기껏 10억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술을 먹고 음주운전을 해서 사람을 죽여도 5억 정도 주고 3~4년 감옥에서 살다나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못배우고 천박해도 돈이 많으면 선생은 내가 주무를 수 있다는 생각이 이 나라에 만연하다. 돈이 많으면 선생이 아니라 내가 별도로 아이를 더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있다. 그렇다면 학교는 왜 보내는가? 


극단적 이기주의가 만연해있다. 내 자식은 2등이 되면 안되다는 강박관념이 이제 종양처럼 뿌리내렸다. 이 나라에서는 이제는 모든 아이들이 부모들의 완벽한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 무대에서 내 자식이 조연을 맡는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한 무대는 학부모가 박살을 내버린다. 그리고는 내 자식이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무대를 다시 찾아간다. 그러면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 그것이 정상인줄 안다. 사실, 지금 80년대생 학보무들이 어렸을 때 그렇게 배웠을 수도 있다. 


빈약한 법체계가 사람을 옹졸한 법치주의자로 만든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으면 시시때때로 소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는 훈계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지만, 법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법치체계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말이 휴대전화로 녹음이 되어 법정에서 모욕죄나 허위사실유포로 고소가 된다. 이제 선생님들은 학생에게 존댓말을 쓰고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법적책임을 면할 수 있다.



◼︎ 미래

앞으로는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3D업종이 될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아이들을 대학입시를 위해서 줄세우고 체크하는 용도로밖에는 활용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집에서 영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학원에서 수학과 영어를 공부할 것이다. 사회적인 교제는 SNS로 모두 해결할 것이다. 결국 학교갈 일은 없어지는 것이다. 학교는 모두 문을 닫고,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없어지고, 대학입시는 인터넷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 대책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가 바뀌면 된다.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가치관이 바뀌면 가능하다.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하시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정서의 기저에 깔리는 것. 오래 산 사람의 이야기가 왜 중요한지, 성현들의 책들이 왜 피와 살이되는지를 진실로 깨닫는 것. 공교육의 절대적인 권위와 보호가 바르게 세워져서, 그 울타리와 시간 속에서 온전하게 정상적인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러한 것들이 국민 전체의 삶에 스며들어 말 없이 서로 인정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지금처럼 비현실적인 사고들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30903050100061?input=1195m

https://www.yna.co.kr/view/AKR20230903032700530?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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