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누구다 다르다. 차이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21세기 민주사회의 기본 틀이다. 누군가는 백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흑을 좋아한다. 또한 누군가는 직선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곡선을 좋아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양성이 모여 현대사회의 문화적 풍요를 이루고 그 안에서 인간 삶의 변화무쌍한 문명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인권을 기준으로 한다면 다양성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건 정신이 죽건 그것은 인간존재 그 자체의 생명과 연관된다. 내가 흑을 좋아하고 당신이 백을 좋아하는 차이는 우리의 생명과 별 상관이 없지만, 강도가 칼을 들고 달려온다면 누군가는 죽어도 되고 누군가도 살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럴 때에는 다양성을 뛰어넘어 모두가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법칙이 지배한다.
이 나라의 정권을 잡은 무리들의 노골적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아연실색하게 된다. 그들의 논리는 100년 전부터 한결같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책임은 오로지 피해자에게 돌아간다는 생각. 일제식민시절을 맞이하게 된 나 자신을 탓해야지 일본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여인이 어두운 밤 길거리에서 강간을 당하게 된다면, 범인을 탓하기 이전에 치마를 입은 피해자의 잘못을 따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인간이 아닌 짐승들의 세계에서 적용되는 법칙이다. 이러한 악육강식적 인식은 내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던 인간성, 혹은 언어를 쓰고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자존감에 대한 영역을 한참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리하여 그 음을한 무저갱의 어둠과 피비린내 가득한 공간 속에서, 힘에 대한 막연한 찬양과 무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요구한다. 어린 사슴을 잡아먹는 사자의 눈에는 가책(呵責)의 씁쓸함이 스미지 않는다. 다른 존재를 죽이고 내가 살아남는다는 우월(優越)의 응시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논리를 펼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진정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다가 성추행을 당했다면,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고 다닌 당신 자신을 탓하라.
길을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당신의 지갑을 소매치기한다면, 평소 지갑을 들고 다닌 당신 자신을 탓하라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게 된 당신의 존재자체를 탓하라.
사기를 당했다면 바보같이 사기를 당한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라
혹 누군가에게 칼에 찔렸다면, 칼에 찔리는 육신을 갖게 된 당신 자신을 탓하라
통제 없는 공공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 무리에 짓눌려 압사당했다면, 싸돌아다닌 당신 자신을 탓하라
수학여행 때문에 배에 올라탔다가, 리더의 배신으로 당신이 배와 함께 침몰했다면, 그 배에 올라탄 당신의 운명을 탓하라
열심히 일하라고 뽑아놓은 정치인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지역주민을 괴롭히기 시작한다면, 리더를 잘못 뽑은 당신의 뇌를 탓하라
죽을 만큼 노력해서 자영업을 하는데도 계속 적자가 나고 물가가 오른다면, 이 나라에 태어난 당신의 무능함을 탓하라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에 범인은 없다. 오로지 밟고 올라서는 승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인간으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인간이기를 포기할 것인가?
출처 :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