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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23. 2024

비극의 탄생 / 니체 / 1872

아카넷 / 박찬국 옮김

현대인이 향유하는 모든 서사극의 원형은 고대그리스로부터 말미암았으리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서부터 시작해서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왕,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거치기까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극 연출의 모든 작법들은 이미 2000년도 넘는 시기에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고귀하고 높은 권세를 가진 인물들이 우연한 실수 혹은 알 수 없었던 이유 때문에 파멸하고 몰락하는 이야기들이며, 우리는 그 광란적 운명의 비상과 추락 속에서 삶의 공포와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 들여다보면서 한편으로는 역동성과 생동감을 찾기도 한다. 서로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가치의 결합, 즉 고통과 활기의 일체감이라든지 파멸과 아름다움의 합일 같은 감정은 어떻게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19세기말, 니체라는 고독한 천재가 유래 없는 독창적 관점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리스인은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즉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리스인은 그러한 공포와 끔찍함에 대해서 올림포스라는 찬란한 꿈의 산물을 내세워야만 했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실존의 공포와 무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비극이라는 예술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책의 첫 페이지의 첫 문장부터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자신이 설파한 내용의 갈래를 미리 선언하고 도발한다. 아폴론적인 예술은 조각, 서사시, 건축, 명료함, 광명, 꿈, 이상 같은 조형성을 갖춘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음악, 서정시, 춤, 도취, 합일, 융합 같은 비조형성을 드러낸다. 예술을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니체의 분류를 통하여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존재에 대해서 이해의 접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두가지의 기준을 연상시킨다. 입자와 파동은 개별성과 합일이라는 명확한 구분을 떠오르게 한다. 얼어버린 호수의 표면은 형상화할 수 있지만, 물결치는 호수의 표면은 측량이 불가하다. 우스개이지만, 닭을 한마리 구워서 뜯어먹는 것과 삼계탕으로 만들어 국물에 녹여내는 음식의 경계 또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인 접근을 상기시킨다.


깊게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그의 사상은 고대그리스 시대의 비극에서부터 출발하여,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서로 융합하여 만들어내는 파멸과 상승의 도가니에서 인간의 생동감을 되찾으면서 그 가치를 가리고 은폐하려는 모든 도덕적 염세주의와 종교의 허상을 고발한 후 신의 죽음을 외친 후, 결국 인간 스스로 대지 위에 서서 자신을 초극하고 마치 영원히 회귀하는 듯 매번 반복되는 생의 고통과 넘치는 에너지의 연소를 위하여 두 다리로 세상에 우뚝 설 것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 유별난 천재의 고집스러운 이론은 당대 모든 학자들의 지독한 혹평을 유발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고백하였듯 어디까지나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반항하며 자립하고자 하는 일종의 용기였으며, 이제 그의 사후 1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으며 모든 인문학자들의 사상과 가치관에 어떠항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 지위를 확립하였고 생각한다.


니체의 일방적인 설교에 귀를 열고 무심코 비극의 족보를 따라가다 보니, 탐미주의 작가들의 화려한 작품들이 떠올랐다. 오스카 와일드와 마조흐,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의 반항기는 파멸과 퇴폐의 미학을 드러내며 인간 본성 깊숙하게 뿌리내린 관음과 호기심의 통증을 유발하는 듯하였다. 카뮈와 장 그르니에가 찬란하게 빚어낸 그 절망적 사랑의 이율배반적 송가는 시지프스의 돌이 영원히 굴러 떨어지면서도 다시 끌어올려지는 당위성을 떠오르게 한다. 기타 근현대 소설 대가들의 작품들과 관련하여 니체의 비극론이 나에게 준 영향은, 마치 고대 선조들이 깎아놓은 암각화가, 과학으로 밝혀진 역사의 흔적들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라는 실존의 부담과 모양새가 실은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마주해야 하는 일종의 자기 훈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비극은 그와 동일한 비극적 신화를 통하여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형태로 개별적인 생존에 대한 탐욕스러운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경고하는 손으로 다른 삶과 보다 높은 기쁨을 상기시킨다. 투쟁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몰락에 의해서 이러한 기쁨을 예감하고 준비한다.


비극의 탄생을 읽는 것은 니체라는 괴짜의 커다란 고집과 싸우는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사유의 근육이 단련되고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시야가 넓어진다. 이 유별난 책은 고대로부터 되짚어보는 실존의 처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음악이라는 주제로 끝맺는 하나의 시 같은 작품이다. 그는 결국 음악을 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종잡을 수 없는 창의력과 소재가 불쑥불쑥 끼어들어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지만 결코 혼란스럽지는 않다. 신선하고 독창적인 논지는 앞뒤와 아주 단단하게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철학은 독창적 시선으로 이 세상을 느끼는 것이고, 예리한 감각으로 절묘한 부분을 감지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니체는 지독하고 고독하고 때로는 따스하면서도 섬세하며 또한 확고하기까지 한 발명가이다. 나는 니체로부터 인간의 삶을 다시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100년이 지나 다시 부활한 천재를 기념하며.


비극의 탄생은, 박찬국 교수의 해설서를 읽으면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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