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 윌리엄골딩 / 1954

사악(邪惡)의 정체성

by Silverback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도덕과 윤리의 제약 없이 행동하는 동물원 속 생명체들의 모습 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야생의 에너지를 느끼듯, 인간은 그들이 걸치고 있는 제도화된 옷을 들추어내고 그 속에서 잠자고 있는 야만적인 본능을 찾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귀를 기울여보고 싶어 한다. 약육강식의 본능이 내 안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는 애써 이룩한 고도화된 문명의 틀 속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고귀한 생명체이기를 자부하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선과 악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인간은 도대체 어떠한 성질의 생명체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1954년 윌리엄 골딩이라는 작가가 도발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이 가져다준 인류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고스란히 체험한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과 선과 악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구조의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지를 풍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라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어른들은 하나도 없어?

이 소설은 소년들의 탐험이라는 친숙한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 '15소년 표류기'나 '산호섬', '보물섬', '로빈슨크루소' 같은 모험담에 익숙한 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의 정복 세계관을 태평양 한가운데의 무인도로 끄집어 왔으며, 그 속에 조난당한 소년들을 가두어놓고 그들이 어떻게 생존해나가는지를 응시한다. 문제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과, 바다 한가운데에서 격추를 받아 불시착했다는 점이다. 작품의 첫 부분에서, 생존자 피기(돼지)라는 아이가 최초로 만난 친구 랄프에게 '어른은 없어?'라고 묻는 장면은 사고의 전모가 어른들의 행위로 인하여 일어났으며, 그것이 권력자 혹은 문명의 체계 같은 것으로 작품 전체에 관여하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게 단순해 보이고 다소 동화적인 분위기는 어쩌면 고전 신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상징성이 강한 우화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의 틀 역시 단순하다. 어른이라고는 없는 무인도, 불로 연기를 피워 외부로부터의 구출을 꾀하는 랄프(Ralph)의 무리, 육체적 생존을 위하여 무기를 만들고 사냥을 하여 섬의 정복자가 되고픈 잭(Jack)의 무리, 그리고 한 사람씩 발언할 수 있는 민주적 도구인 소라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인 피기의 안경,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짐승', 그리고 귀로 들리지 않는 메지시를 듣고 예언적 이야기를 하는 소년과 같은 소재들이 그러한 틀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으며, 작가는 이렇게 마련해놓은 세트장 위를 내려다보며 생존을 위해서 아이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떠한 생각들을 발전시켜나가는지를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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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 이후 최초로 집회를 연 아이들은 소라를 든 자만이 발언의 기회가 있다는 룰을 정하고, 공정하게 투표를 하여 랄프를 대표를 선출한다. 외부에서의 구출을 기다려야 하니 불을 피워서 연기를 만들자고 서로 합의를 하게 되며, 랄프는 아이들이 거처할 쉘터를 만드는 것을 담당하고, 잭은 자신들이 사냥을 하면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진다. 잭의 무리에서 사냥을 하면서 불이 꺼지는 것을 몰랐던 것. 불이 꺼진 사이에 무인도 주변을 지나가던 함선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며, 랄프는 불 관리를 하지 못한 잭에게 책임을 묻는다.


얼어 죽을 규칙 같으니! 우리는 강해. 우리는 사냥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플롯은 단순하게도, 초반에 명확히 선이 그어진다. 아이들은 서로 모여서 투표를 하고 구조를 위한 공통적인 안건을 협의하였지만, 오로지 불에 의지하며 가만히 구조만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의 잭은 섬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짐승'이라는 공포와 식량문제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최초로 선출한 랄프를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약속했던 룰을 깨트린다. 무력을 동원하여 생존을 위한 사냥과 정복을 꾀하는 전체주의적 잭의 무리와, 탈출을 위해 의견을 모으고 방법을 모색하자는 민주주의적 랄프의 무리가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바라본 20세기 전쟁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라는 것이 이렇게 단순하고 도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이분법적 가치관의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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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지? 나는 너희들의 일부분이야. 아주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일부분이야. 왜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이 모양으로 되었는가 하면, 그건 모두 나 때문이야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작가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실체 없는 괴물이 아이들을 위협할 것이라는 공포심도 결국 집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그들에게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도 결국 그들이 사이먼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사이먼이 사람으로 변장한 괴물이라는 합리화의 명분 아래 개개인들에게 면죄부로 작동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참히 침략을 감행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던 2차 대전 전범들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느껴진다. 악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안에 들어있다고 소리 없이 말을 하는 파리의 대왕(성서에 등장하는 악의 우두머리인 Beelzebub의 영어 해석)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작가는 역설하고 있다. 실체 없는 괴물이 악한가. 아니면 그러한 괴물을 찾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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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은 일종의 패러디 우화이다. 작품의 등장인물 이름에서 미리 알 수 있듯이, 1858년 로버트 밸런타인 작품의 '산호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여, 19세기 유토피아적 낙관론을 무참히 깨어버린 후 그와 반대로 뒤틀리고 기괴한 모습을 한 인간의 욕망을 조롱한다. 작품의 후미에서 구조를 위해 섬에 도착하는 어른의 입을 통해서 '처음에는 산호섬에서처럼 잘 지냈단 말이지?'라고 되묻는 장면을 읽을 수 있는데, 당시 제국주의 사상과 식민지 침탈에 목숨을 건 유럽 열강들의 우월의식과 선민사상을 무참히 꼬집고 있다고 느껴진다.


시종일관 작가는 잭의 무리를 야만과 폭력성으로 물든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글을 읽는 내내 과연 랄프 집단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잭의 무리가 절벽에서 커다란 바위를 굴려 넘어뜨리는 순간 두 손으로 소라를 부여잡고, 훔쳐간 안경을 돌려달라고 외치는 피기의 모습은 마지막 남은 민주주의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물론 랄프의 무리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연약함은 비단 그들이 폭력의 반대편에 서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력은 결국 권력의 도구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자르는 역할이 아닌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위험 때문에 소라의 권위가 연약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위태로움은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보호하고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라의 의미와 총칼 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선과 악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영화 파리대왕, 피터브룩 감독, 1963

소설 파리대왕, 소담출판사, 유혜경 역,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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