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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pr 28. 2024

시선의 높이

지구상 만물은 중력이라는 고삐로 인하여

수평으로만 움직이면서 존재하기에

넓은 면에 골고루 퍼져있는 형상을 띤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쉽게 포착하기 위해서 흔히들

수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로 굽어보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눈에 펼쳐진 모양새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행태는 우리 삶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권력자는 높은 연단에 올라서서 청중을 내려다본다

어른은 큰 키를 이용하여 아이를 내려다본다

건축가는 평면을 책상에 펼쳐놓고 내려다본다

오만한 자는 고개를 살짝 들고서 눈동자를 움직여 상대를 내려다본다

사람은 작은 곤충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서 허리를 굽혀 내려다본다

산에 오른 자는 드넓게 펼쳐진 인간세상을 관조하기 위하여 내려다본다


하지만, 무언가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옆모습 대신 정수리를 본다는 뜻이다

정수리는 흔적을 뜻하며, 

표정을 담고 있지 않기에 감정을 배제시킬 수 있다

감정을 배제는 일방적 인식을 유도하고

그것은 압박과 우위의 정서를 형성한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대개

옆모습이란 실생활, 체험, 일상, 친근감, 풍경, 시간, 속도, 고통, 행복과 연관되고

정수리란 통계, 수치, 의도, 계획, 욕망, 허무, 우열, 교만과 연관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책상에 펼쳐진 평면만을 가지고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공간을 그려대던 건축가들은

눈을 수평으로 들어서 인간의 실생활에 펼쳐지는 입체성을 계획할 수 없다

그들은 3D 프로그램을 싫어하고 공간의 서사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토지의 구획선과 건축면적의 경계선을 먼저 확인하려 든다


높은 연단에 올라서서 수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연설만 하고 지휘만 하던 권력자들은

단상에서 내려와 눈이 서로 마주쳐지는 시선의 교감에 서투르다

그래서 그들은 웬만하면 일반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숨고 기어들어가 귀를 막아버리기 일쑤이다


대중들의 소비성향을 수치로 내려다보면서 돈을 버는 기업들은

사람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개성과 욕망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이 없고 의지도 없다

오히려 사람을 데이터로만 생각하고 지갑의 개수와 수준으로만 파악한다


전통적으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위엄과 교만, 공포의 윤곽을 갖춘다

반대로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궁핍과 갈망, 애원의 윤곽을 갖춘다

그러한 이유로 황색언론과 보수 미디어에서는

권력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사진을 찍어 높아 보이게 만들고 

서민들은 위에서 아래로 사진을 찍어 낮아 보이게 만든다


어느 날 구글어스를 이용하여 파르테논 신전을 내려다보라

당신은 누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 한 

오로지 한낱 버려진 자갈 언덕 위에 허름하게 표시된

지도상의 한 구획일 뿐이기에

고대 그리스의 문명이 태동한 아크로 폴리스의 정신을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의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를 옆에서 바라본다면

수천 년을 버텨온 석조표면의 질감이 석양의 붉은빛을 긁어대면서 전하는

인류문명의 근원과 인간성의 숭고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무언가를 체험하고 느끼고 알고 싶다면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아래에서 쳐다보지도 말고 

섞이고 파고들어 가 바로 옆에서 교감하라


그러면,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숨어있는 진실이 드러나고

남에게 말해주지 않은 비밀이 말을한다.


高巓不敢上 不是憚躋攀(고전불감상 불시탄제반)

恐將山中眼 乍復望人寰(공장산중안 사부망인환)

높은 산을 감히 오르지 않는 것은

오르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다보는 시각 만을 가지고서

인간세상 보게될까봐 걱정해서지

- 이규보(李奎報) 북산잡제(北山雜題) 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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