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명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과 연관된 이야기를 통해서 남성중심 지배의 역사와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목소리를 낸 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미술사 전반을 아우르는 탄탄한 자료와 논증이 일품이다. 나이팅게일에게 씌워진 천사(天使)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망치를 든 전사(戰士)의 쌩얼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단호한 서문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녀만의 통쾌하고 명료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 김지은입니다, 혹은 리베카 솔닛의 명저들로 상징되는 페미니즘 문학으로 일부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예술, 특히 미술분야에 매진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학역사에 많이 기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속에서 다루어지는 여성인권에 대한 선례들은 흔히 명작, 혹은 예술작품으로 평가되면서 그 속에 완전히 가려지고 파묻힌 젠더문제의 본질적 폐쇄성과 불평등을 오히려 반어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과연 우리는 렘브란트와 루벤스, 고갱,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대가들의 이면에 숨겨진 성적 일탈의 면모를 얼마나 인지하고 있었던가. 천재 혹은 거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티스트들의 도덕적 면모는 완전히 무시된 채, 그러한 창작의 결과물들이 마치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작가들의 일탈을 연소시켜 얻은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된 평론을 접하고 교육받으면서 살아왔지 않은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우리가 어떠한 예술 작품을 대할 때, 그 작가의 에토스와 모럴을 완전히 배제한 채 작품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감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는 6개월 동안 마리 테레즈를 쫓아다녔다. 피카소는 그녀를 서커스와 극장에 데려가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환심을 샀고, 마리테레즈의 어머니에게도 초현실적인 초상화를 그려주며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 마리 테레즈는 그 과정에서 피카소가 아주 유명한 예술가라는 것, 그리고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카소는 계속 속삭였다. "우리는 함께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마리 테레즈는 그의 숨겨진 정부가 된다...... 피카소는 다시는 마리 테레즈 곁으로 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들과 스캔들을 뿌리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카소를 기다리며 비혼으로 혼자 딸을 키우던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 사망 4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는 해당 작품을 감상하는데 깊은 이해도를 선사한다. 게다가, 단편적인 이야기 부분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과 주변 인물들과 얽힌 서사가 덧붙여지면서, 독자들은 작품을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유리 작가의 객관적 시각과 주관적 논점이 서로 배척하지 않은 채 논리의 짜임새를 만들면서 '인권'이라는 하나의 축을 타고 전진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의 저자 밸러리영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여성들을 가면 증후군으로 이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회는 남자보다 여자의 실수에 더욱 엄격하고 그렇기에 여자들은 자신이 여성 일반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할까 봐 불안감이 크다.
성실함을 무장한 준비와 깊은 배려의 의도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읽으면 텍스트를 따라가다가 왠지 모르게 점점 은근슬쩍 약이 오르고 대꾸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 질 때 즈음 여지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강력한 논거들은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사실들이다. 여성 작가가 남성이름을 필명으로 써서 출세한 뒤 본명을 공개했을 때 되돌아오는 혹평을 보고 우리는 마치 선사시대에나 일어날 일인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러한 젠더차별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책 본문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여전히 2024년도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여자 앵커들이 뉴스데스크에서 안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는 안경을 쓰는데, 여자는 99% 쓰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24년이 되어서도 규모가 있는 기업 회장의 비서는 여성으로만 선발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어지러운 세상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젠더 간 혹은 세대 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것이 이 책의 커다란 힘이다. 더도 덜도 말고 사람들이 모인 토론 공간에서 딱 이 한마디만 던져보라.
'왜 여자 앵커들은 안경을 안 쓰는가?'
이 책이 다루는 인문학적 사안들, 젠더이슈, 혹은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이 밑도 끝도 없이 스며 나올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책을 읽어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젠더의 이슈를 살펴보고, 그것을 토론의 장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이러한 족집게 같은 책들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hLv3ZD3qw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