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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y 24. 2024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 류시화 / 2019

고통이 스며든 단어, 연륜이 녹아든 문장, 삶의 질곡을 겪은 성현들의 보석 같은 일화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와서 박힌다. 나약한 육체를 이끌고 처절하게 살아온 작가의 인생이, 지구 곳곳에 있는 지극한 명상의 장소들에서 쌓은 경험과 하나가 되었다. 독자들에게 이럴 때 이렇게 해라, 혹은 저럴 때 저렇게 하라고 조언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인생의 시행착오를 겪은 수많은 일화 속 담담하고 소박한 경험담들이, 그 글을 차근차근 읽는 독자들에게 저절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 공감은 발림말과 긍정을 강요하는 처세의 학습이 아니다. 나의 고통과 슬픔이 결국 나만의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은 누구나 동일하게 떠안고 있고,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고백함으로 인해서 얻는 공감이다. 


이 책은 나의 내면을 훔쳐보는 듯하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숨겨놓았건만 들켜버린다. 하지만 이내 곧, 작가 또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닫았던 마음의 장벽을 한 순간에 허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전하게 작가에게 오픈했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이 책을 읽으니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는 먼저 나의 보호막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끝까지 귀와 마음을 열고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유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무엇을 욕망하고자 하는 자유인가, 아니면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자유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를 조용하면서도 지독하게 파고든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은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칼융 / 기억, 꿈, 회상 中)


휴대폰은 근 10년간 눈부시게 발전하여 수십 배의 속도를 높여왔다. 다양한 기능과 시스템을 구비하여, 이전보다 편리하고 빠르게 원하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그렇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만큼 빨라진 도구를 손에 쥐고, 과연 그만큼 단축된 시간으로 얻은 나만의 여유시간과 느긋한 마음의 평화가 생겼는지를. 기존에 정보를 검색하려면 1시간이 걸렸건만, 이제는 10분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에 비해서 나머지 50분은 과연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 아니면 그 50분 동안 더욱 많은 집착과 몰두에 정신을 쏟아야만 하는 멍에에 들씌워지지는 않는가?


삶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인생이 달리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과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바뀐다. 젊어서는 몰랐으나, 나이가 들수록 뼛속 깊숙하게 그것들을 느껴간다. 앞으로 나이가 더 들수록 더욱 절실해질 것 같다. 왜 나에게만 이러한 고통이 오는가가 아니라, 드디어 나에게도 성장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신호 말이다.


생의 한 대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발췌할 수 있도록 배열된 인상적인 문구, 강렬한 아포리즘을 절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나눈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읽으면, 책 전체가 하나의 잠언처럼 엄청난 공감과 위안으로 다가온다. 나는 글과 문장이 아닌, 말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자리 잡은 책을 마주했다. 좋은지 나쁜지 그 누가 아냐는 듯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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