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언어를 사용하는 고등 동물체의 세계에서 적어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라면 아마도 약육강식과 포식의 논리만으로 성립될 수 없는 문화적 합의와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연대와 공감, 그리고 배려와 사랑의 감정을 배양하고 키우고 보존하려는 의지적인 행동일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생태계의 동물적 본능을 뛰어넘고, 우리 인간이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오면서 자신 이외의 모든 생명체와 환경을 지배할 권리를 획득하는 것에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기로 하였던 것이고, 오로지 인간만이 DNA의 폭정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생명체라는 저명한 생물학자의 명제를 뒷받침한다. 리베카 솔닛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의미의 인간존엄성, 단지 성별이 구분된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뿐만이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생명체로써의 가치와 개개의 인생이 어떻게 고려되어야 하고 얼마만큼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따지는 거대한 범주로서의 담론이다.
행복에 대한 질문은 보통 우리가 행복한 삶이 어떤 모양인지를 안다고 가정한다. 행복은 종종 멋지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줄줄이 늘어선 결과로 묘사되지만, 잠깐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저것들을 다 갖고도 여전히 비참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행복한 결말을 가진 하나의 좋은 플롯만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삶이란 사실 우리 주변 사방에서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꽃 피울 수 있다.
이 세상을 재단하고 구분하려는 여러 시도들(성별, 인종별, 지역별 등)과 줄을 긋고 경계 지으려는 역사적인 흔적들에 집중하면서, 작가는 그러한 울타리 치기의 평면성과 단순성이 언어의 한계와 부딪칠 때 발생하는 누출의 오류와 폭압성을 고발한다.
언어란 연속된 일반화를 통해 불완전한 그림들을 스케치해 나감으로써 무엇이 되었든 뜻을 조금이라도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범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범주는 필수적인 만큼 위험하다.
쉴 새 없이 제출되는 역사적 사례와 수많은 증빙. 혹여 빠뜨렸을지 모를 논거를 재확인하려는 듯 탄탄하게 바느질되는 작가의 되짚어보기식 주장은 한결같은 무게와 템포를 지닌 채 처음부터 끝까지 낮지만 강력한 어조로, 언어를 통하여 감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인간 삶의 다양성과 사회적 성별로서의 젠더역할에 대해서 마치 그림을 그려나가듯 차근차근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려는 듯하다.
우리 남자들은 강간문화에서 혜택을 입습니다. 우리는 강간문화가 여자들에게 끼치는 고통으로부터 혜택을 입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앞서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간문화가 여자들을 경주로에서 밀쳐내고 공간을 열어주기 때문에 혜택을 입습니다. 강간문화가 여자들을 인간이 아닌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이 더 위대하게 빛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혜택을 입습니다. 강간문화가 우리에게 가해자 혹은 수혜자로서 힘의 광휘를 둘러주기 때문에 혜택을 입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혜택을 입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대를 그다지 떠들썩하게 내지 않습니다 -Teju Cole-
그녀는 애면글면 하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는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빙산의 하부를 증거 하는 방식은 얼음의 작은 일부를 떼어내어 물에 다시 띄우고 공개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노련함이다.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는 침묵의 덩어리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감각함과 혹은 피해자들 마저도 그 아래에 갇혀버린 상황을 직시하면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빙산을 잘게 쪼개어 나갈 것을 요청하는 듯하다. 거대한 암흑 덩어리가 사람들의 외침과 공감대로 잘게 쪼개어지면 그 침묵의 거대빙산은 제각각의 사이즈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될 것이다. 그녀는, 무겁게 누르면서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그 빙산의 어두운 침묵에 대항한다.
수치심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자들을 침묵시키는 중대한 요소다. 수치심은 사람을 침묵시키고 고립시키고 범죄가 지속되게끔 만든다. 언론은 전통적으로 강간 피해자를 '보호하는'차원에서 피해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이 전통은 피해자가 당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암시하고 피해자를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고립되게, 침묵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가 있다.
어쩌면 이 책 전체는 침묵에 항거하는 이야기이다. 낡고 오래되어 자신을 속박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우리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자리 잡은 전통이라는 고정관념, 문명의 이기를 얻기 위해서 희생해야 했던 여러 지나침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일단 멈추어서 상황을 직시하고 되돌아보면서, 적어도 인류의 절반이 차고 있는 족쇄를 걷어내자고 독려하는 깊은 울림이다.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폭력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 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 준다.
리베카 솔닛은 젠더이슈를 포함한 다양한 양립적 구조 속에서 무엇이 한 편에 쥐어지고 무엇이 한 편에 결핍되는지를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파고든다. 그리하여 한쪽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 알고리즘을 전개함으로써, 페미니즘에 대한 접근 자체를 성평등 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아닌 인문학적 해부와 철학적 사색의 거대한 담론으로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
포르노그래피의 기반에는 육체적인 것에 대한 혐오, 욕망에 대한 분노, 그 욕망과 분노를 여성에게 투사하는 태도가 있다... 우리는 포르노그래피의 '여성'은 반유대주의의 '유대인'이나 인종주의의 '흑인'처럼 우리 영혼의 잃어버린 부분에 해당하는 것, 포르노그래피적이거나 인종주의적인 우리 마음에 잊고 부정하는 존재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다분히 젠더의 문제뿐만이 아닌, 인간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편 가르기와 불평등에 대한 기원을 더듬게 하는 힘이 있다. 고집과 오만을 완전히 배제한 현명한 작가의 지적이고 날카로운 힘이 넘치는 사색은, 어쩌면 작가가 초반에 걱정했던 - 누출의 위험을 안고 있는 언어의 범주적 한계를 뛰어넘어,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오히려 곡선으로 이어진 인간의 다양한 삶을 어루만져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길고 너른 대로이다. 계급, 인종, 가난과 부 등 다른 많은 것들이 이 길과 교차한다. 이 대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다른 길들과 만난다는 뜻이다.
국경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구름은 알고 있다고 말한 쉼보르스카의 명언을 기억하자. 남자가 사냥을 해오고(돈을 벌어오고), 여자가 애를 돌봐야 한다는(육아) 아주 오래된 고정관념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깨닫자. 폭력과 권력이 자행되어 왔던 역사가 지구 곳곳에 어떠한 결말을 가지고 왔는지 되새기자. 사람의 성을 상품화했을 때, 젠더의 구분을 오로지 수치로만 효율화했을 때 우리가 얻은 것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사색해 보자. 과연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뒤로 가고 있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