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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10. 2024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솔닛 / 2013

The faraway nearby

회고와 사색, 모험과 용서를 동반한 명상의 파노라마이다. 우리가 카뮈의 에세이에서 태양과 바다를 껴안으려는 철학자를 떠올릴 수 있다면, 리베카 솔닛의 이 유례없는 에세이에서는, 한 사람의 온전한 내면과 존재가 '시간과 거리'라는 실로 엮이면서 드러나는 길고 은밀한 그림을 마주할 수 있다. 그 그림은 오래전 동굴 벽에 새겨진 흔적처럼 점차 기억과 회고라는 빛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우리에게 저자의 성장기를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영화 '더셀(The Cell)'을 연상케 하는 내면탐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일종의 동굴을 발견하는 모험이다. 작가 또한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모험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서로의 모험을 동시에 시작하는 것이다. 어떠한 장르로 못 박을 수 없는 이 독특한 서사는, 뼈와 피를 가진 인간이 성장하면서 맞닥뜨리는 슬픔, 기쁨, 좌절, 변화의 과정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여러 신화와 동화들 그리고 가깝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사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적으로 풀어놓는다. 이 회고록은 일종의 커다란 시(詩)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차분하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서술되는 작가의 회고는,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페메니스트 여전사라는 이미지를 무색게 할 정도로 기품이 있고 여유롭다.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기억의 동화 속 미장센으로 변화되는 마법에 빠지고 나면, 우리는 리베카 솔닛의 대담함과 노련함에 숙연해지게 된다.


어쩌면 언어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길 없는 작가의 인식과 느낌들은 사실 인간이라면 모두가 스스로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심상(心象)적 노력들과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희생을 펼쳐 보여주는 얼음 관련 동화라든지, 백설공주의 거울 속 대칭성, 새의 눈물을 먹고 기생하는 나방의 기생성을 통해서, 연대나 공감, 감정이입 같은 관계적 정서를 떠올릴 수 있다면,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소재를 통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끌고 나가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지 않을까.


슬픔은 늘 거리와 공간을 가지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반면, 최상의 행복은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슬픔과 행복은 각각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이 집필에 대하여, "쉽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내 삶이 더 풍부해졌던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 책의 마침표를 찍기 직전 그녀는 결국 어머니가 그립다고 썼다. 용서와 관용, 그것은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해방을 이끌어낸다. 그녀가 평생 사숙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천사 또한 오히려 죽었다기보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해방된 것이리라. 


어머니의 불행은 내가 끌고 가야 할 썰매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여러 인생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가를 탐구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에세이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도 언급했듯, 삶이란 여러 요소들 속에서 서로 빚지고 있는 관계에 대하여 떠안는 부채의 형식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이 모두의 인식에 파고들어 서로에게 스며들고 관계맺는 방식이야말로 리베카 솔닛이 집중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동안 그녀만의 얼음과 추위, 그리고 따듯한 입김이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자신만의 보금자리. 운명적인 성장을 요구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기회. 마침내 놓치지 않고 용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북극으로의 탈출.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다양한 삶과 죽음들. 하나씩 차근차근 따라가 보자.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다시 사람들과 대화해 보고 우리 서로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음미해 보자. 단단하게 살아낸 여인의 잠언은 당신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명상의 시간과 순수한 기쁨을 제공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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