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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28. 2024

고양이를 쓰다 / 나쓰메 소세키 외

세계적인 작가들이 사랑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세이와 시, 단편소설 등이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고양이를 사랑하는 책벌레들에게 유레카를 외치게 할 것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고양이의 처음과 끝이다. 찬미이자 회한이고, 신화이자 명상이다. 고양이를 키운 적이 없는 나조차도 벌써부터 내 곁에 집사님이 와 계신 듯하다.


기라성 같은 20세기의 인문학 대가들이 항상 그들 곁에 두었던 생명에 대한 시선을 보라. 장소에 대한 자유분방함, 육체에 대한 야수성, 사랑과 관심에 대한 예민함,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자의식까지. 어찌 보면 고양이는 고단한 삶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책상과 노트 속에서 지독하게 군림하는 쓸쓸한 작가들을 닮지 않았는가.


고양이는 사람의 안색을 살필 줄 안다고 하지만, 때때로 사람의 기분을 가장 무시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마당 구석이나 툇마루 한쪽 끝, 책상 위 같은 데서 그저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혼자 몽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 몽상 속에는 육식 동물이 지닌 야성의 꿈이 있다. 고양이 속에는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있다. 나는 그것을 내 안에서도 느낀다. 사람을 만나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어 혼자 가만히 있을 때 느끼는 그 침잠한 기분은 도덕적인, 관습적인, 세속적인 것으로 그 밑바닥에는 뭔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야성적인 것이 존재한다. 도덕이나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 무언가다. 그리고 그 야성적인 무언가의 안에 예술의 싹이 가장 많다 (고양이의 성격 / 도요시마 요시오)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국민들로 인식되는 일본 작가들의 관찰력이 대단히 세밀하다. 지금이야 뭐 사람들이 실내에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지만, 1900년대 전후만 해도, 고양이는 가둬놓고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롭게 밖에서 돌아다니고 싸우고 사랑하고 어느 집이건 들어가서, 처음 보는 주인의 밥상머리를 기웃거리고 잠시 사랑을 받다가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김삿갓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근대화의 물살에서 어리둥절한 시기를 보냈던 서구 작가들은 일본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고양이를 마주한다. 강아지처럼 친밀한 관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귀찮음과 배려라는 일정한 거리에서 나름의 영역을 고수하였던 일본인들의 고양이와는 달리, 그들에게 고양이는 결핍된 인간애의 그림자 같은 것이었으며, 상실한 실존의 투영 같은 느낌도 든다. 그들은 고양이들에게 애정을 쏟았으며, 이루지 못할 소망 같은 것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 같은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일본인들에게 고양이가 자유와 투쟁, 여행과 욕망 같은 동적인 감정 이었다면, 서구인들에게 고양이란 쓸쓸함과 사랑, 상실과 관용 같은 정적인 감정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너무 갖고 싶었어." 그녀가 말했다. "왜 그렇게 갖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불쌍한 새끼 고양이가 갖고 싶었어. 빗 속에서 불쌍한 고양이가 되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잖아." (빗속의 고양이 /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치 너도 나도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서로 손을 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찬란한 대가들의 글들을 모아놓은 것에 감탄을 해본다. 적어도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옴니버스를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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