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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Apr 10. 2020

한중록 / 혜경궁홍씨 / 1795~1806


  '한(恨)이 맺힌 마음을 써 내려간 글'이라고도 하고, '노년의 한가한 시기(閑中)에 자유롭게 회고한 글'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그 유래가 없다고 하는, 일명 '임금의 세자 살해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던 장본인이 그 기록을 풀어내었으니, 후손들이 비로소 250년을 훨씬 뛰어넘는 바로 그 사건의 현장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장엄한 문체, 사람들의 심리를 파헤치는 정교한 필력, 연월일시까지 다루는 철저한 역사의 고증, 그리고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풍속의 세밀한 기록까지 이 책은 역사와 인문학, 심리학을 아우르는 조상의 빛나는 유산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무엇이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지,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인지 개인적인 감상 위주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한중록은 어떠한 책인가


  한중록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둘째 아들(첫째 아들과는 이복)인 이선(李愃, 사도세자)의 비(妃), 곧 혜경궁홍씨(헌경왕후)가 1795~1806 기간에 걸쳐서 쓴 글이다. 대중에 공개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가족들(주로 친정)과 손자(순조임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적으로 기록한 글이며, 때마다 기록하고픈 주제를 정해서 여러 번 나누어 따로 썼기 때문에 각기 다른 때 다른 곳으로 제목 없이 분산되어 필사 및 배포되었다. 그 후 19세기 어느 때에 신원미상의 누군가에 의하여 '한중만록(閒中謾錄)'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총 6권으로 편집된 하나의 책으로 묶였다고 한다. 혜경궁홍씨가 때에 따라서 별도의 주제로 제목 없이 여러 번 쓴 글을, 이후 누군가가 시간의 흐름 순서로 편집하여 묶어 편찬하였으니 우리가 한중록의 근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고 난해하다. 그러나 아래의 순서대로 정리를 해보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우선 첫째로 1795년(혜경궁 나이 61세), 홍씨 가문에 당신의 필적이 없으니 기록을 남겨달라는 조카의 부탁으로 최초 글을 작성했다. 주로 유년시절 및 궁궐 입성 후 맞이하던 일상 등을 다루었으며 가족과 왕족들 간의 관계도 상세히 기록되었다. 본인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되돌아보는 회고록의 느낌이 강하며, 그 시대의 생활과 풍속 같은 것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 궁중생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때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자세하게 덧붙이지 않았다. 19세기에 편집 통합된 한중록 제2,3권에 해당한다.


  그리고 두 번째  1802~1805년(혜경궁 나이 68~71세), 자손들이 알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달라는 가순궁(순조의 생모, 혜경궁의 며느리)의 요청으로 두 번째 집필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사도세자 죽음의 진상을 알리고 있으며, 사도세자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죽음 이후 3년상을 치른 시점, 곧 정조가 효장세자(영조의 첫째 아들)의 아들로 입양되는 순간까지 기록하였다. 사도세자의 성장배경, 영조의 성격, 주변 인물들의 관계, 사도세자가 변모해가는 과정 등이 매우 적나라하게 서술되었고, 마치 궁궐 담장 뒤편에서 장면을 목격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나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 모든 TV 사극 드라마나 영화의 사도세자와 관련한 부분은 대부분 한중록을 표본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세기에 편집 통합된 한중록 제1,4권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1802년(혜경궁 나이 68세), 사도세자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 글과는 별개로 친정집을 변호하기 위한 성격의 글을 따로 쓴다. 이때가 정순왕후(홍씨가문과 대척점에 있던 세력)의 수렴청정 기간이라 홍씨가문이 다시 공격을 받는 시기인데, 아마도 동생이 사사되는 지경까지 가게 된 것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통합 편집된 한중록 제5,6권에 해당하며,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1806년(혜경궁 나이 72세), 정순왕후의 대리청정이 끝나고 난 후, 친정집을 변호하기 위한 내용을 추가로 보완하여 부록 형식의 글을 쓰게 된다. 주로 김종수와 김귀주, 김한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으며 기존 한중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을 주요로 한다. '병인추록(丙寅追錄)' 이라고도 불린다.


한중록은 한글본 한글한문훈용, 한문본 등이 이본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나의 심혈이 이 기록에 있도다


  한중록은 통렬(痛烈)하다. 비장(悲壯)하면서도 유려(麗)하고 원대(遠大)하면서도 치밀(緻密)하다. 우리의 오랜 고전언어를 읽고 있노라면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생긴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한(恨)의 정서가 바로 이 곳에 스며있음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여인의 손에서 이렇게 주름진 이야기가 쓰였음에 우리는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글만으로, 닿을 수 없는 시간에 손을 뻗어 그 시대와 사건을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감동이자 기쁨이다. 일반 서민의 삶이 아닌 금기된 왕가의 생활을 고백하면서 그 속에 담긴 사연을 절절하게 풀어내는 능력이 돋보였던 이유는 순전히 필자의 필력과 의지 때문이리라.


  하지만 내가 본 일은 눈 앞에 펼쳐져 있고, 지극한 아픔은 가슴에 박혔느니라. 그것을 이제 써내려 하니 영조와 경모궁(사도세자) 두 분의 부덕을 드러내는 듯 죄스러운 마음이 들되 실상을 아니 기록하지 못하니, 종이를 대하여 가슴이 막힐 뿐이로다.
  끝내 아버지를 따라 죽지 못하고 삼년상을 마치니 동생들이 각자의 집으로 별 같이 흩어지니라. 부모를 모시고 즐기던 일이 한낱 꿈이 되어버렸으니 한 없는 설움이야 어느 붓으로 적을 수 있으리오.
  지아비를 따라 죽는 열녀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효도에도 마음을 저버린 사람이 되니 스스로 그림자를 보아도 낯이 뜨거우니라. 더욱이 집안이 엎어진 일을 생각하다 화가 치밀 적이면 등이 뜨거워 자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아 벽을 두드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내 이렇게 지내기를 몇몇 해나 하였는지 모르니라.
  이렇게 혈육을 보전하여 거느리고 와서 경모궁을 뵈니, 서러운 중에도 내 당신 자녀를 잘 길러냄을 그윽이 고하며 "당신께서 끼치신 빛이 있어 할 수 있었노라" 말하였노라.


  사실  혜경궁 홍씨는 태어날 대부터 왕족의 집안과 연결되어있었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후손이었던 것인데 비록 재물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명문대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선대로부터 과거에 급제한 이가 많았을 정도로 집안 자체가 높은 교양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문(文)에 익숙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입궐 후에는 인사(人事)나 종사(宗社)에 대한 지식수준이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번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녀의 기억력은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날짜와 시간 등에 있어서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특히 주변 인물들이 언급했던 발언들이 뉘앙스까지도 고스란히 그녀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한데,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끄집어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부분에 걸쳐 인용된 인물의 발언들은 그 사람들의 성격과 성품, 기운, 태도 등을 한층 더 자세하게 파악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경모궁께서는 뒤에서는 영조께서 아시면 큰일 날 줄로 걱정하시다가도, 막상 앞에서는 당신 하신 일을 한 점도 숨김없이 아뢰시니, 이는 천성적으로 눈가림이 없으셔서 그러하신지 이상하더라. 그날 대답하시기를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하시니라. "어찌 그러하니?" 물으시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답하시고, "어찌하여 상하였니?" 물으시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하시더라. 경모궁께서는 사람 죽인 일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세세히 다 고하시니라. 영조게서도 그때는 일시 천륜의 정이 동하시던지, 어찌하여 성심이 측은하시던지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일 한 사람을 용서하여, 사람은 막힌 사람이 없게 하고 집은 망한 집이 없게 하여, 태초의 생동하는 기운이 그 가운데 있게 하리라" 하시며, 이렇듯 서서히 해나가다가 1804년(정조가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시점)에 크게 풀자 하시니라. 이에 내 말하기를 "그때 내 나이 칠십이니 내가 칠십 다 되도록 살기 어렵고 혹 그때 오늘날 말과 다르면 어찌하리" 하니, 정조께서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시며 "설마한들 칠십 노친을 속이랴" 하시기에, 나는 1804년만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니라.


  또한 그녀는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왕가의 역사를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10살에 사도세자와 혼인하여 80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70년을 궁궐에서만 살았다. 권력의 핵심에 도사린 수많은 암투와 밀약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남편인 사도세자와 아들인 정조의 죽음까지도 감내하고 홀로 15년을 더 살았다.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종말을 고스란히 목격하였으며,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의 4대조를 아우르는 역사를 거쳤던 것이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그녀가 왕가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해관계에 따른 사람들 - 특히 내인들과 대신 관료 및 척리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도 상당히 뛰어났을 것 같다. 실제로 한중록에서 그녀가 사람들의 행동을 서술하는 기법을 보면 우선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먼저 자세하게 설명한 후에 그 사람이 그러한 처신을 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기술하는데, 사관도 아닌 사람이 그 자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사건의 전후관계와 인간군상의 행태 원인을 구별해낼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아마도 당시 지위와 권리를 이용해서 많은 역사적 자료를 쉽게 취합하고 여러 사람을 부려 하나하나 확인하고 정리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맨 먼저 애달픈 일 하나는 어린 아기를 저승전에 멀리 두심이요, 둘은 괴이한 내인들을 들인 것이라. 이는 여편네 자잘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니 대략 거드노라. 저승전인즉 어대비(경종의 왕비) 계시던 집인데 어대비께서 1730년에 돌아가시어 빈 지 오래지 아니하고, 저승전 저편 취선당이라 하는 집은 장희빈(경종의 친모)이 1694부터 머물며 인현왕후 저주하던 집인데, 강보에 싸인 아기를 이 황량한 전각에 혼자 두시니라. 장희빈이 살던 취선당은 소주방으로 만들어 음식을 만들게 하니,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리오.
  정처가 남편과 자식이 있어 살림의 재미를 알았다면 이토록 일을 어지럽히지는 않았을 듯하니 더욱 애달프도다. 후겸이는 글도 잘하고 예법도 잘 지켜 거룩한 듯 말하고, 세손은 제 아들만 못한 듯 말하니, 실제로 그렇다 해도 어찌 감히 그리하리오. 세손이 차차 따로 계신 후 행여 궁녀들에게 눈을 두실까, 내시라도 사랑하고 아껴부리실까 살피는 눈이 번개 같으니 세손게서 비록 잠깐 쉬실 때라도 마음 놓고 지내지 못하시니라. 세손과 세손빈 사이를 금하기는 1770년부터 심하여, 증거도 없고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굳이 세손빈의 흉을 잡아 세손에게 들리게 하니, 그 사이 빈궁 해하던 일과 핍박하던 언행은 백 가지 천 가지가 넘으니 어찌 다 기록하리오.


  물론 이 책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논지이므로, 혜경궁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반대편에 서있던 사람들과 그 입장들도 들어볼 필요가 있고, 내가 그 역사적 자리에 서있었던 것이 아닌 이상 오로지 글만으로 진상파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혜경궁홍씨의 풍부한 논거의 수준과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인용하고 객관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 그리고 본인 스스로 특별한 이익을 탐해야 하는 2인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점은 이 책을 매우 신빙성 있는 자세로 읽도록 만드는 것 같다.




그날 일의 시종을 분명히 알 것이라


  혜경궁홍씨는 사도세자 죽음의 근원을 정신병으로 보고 있다. 엄중하게 선언하는 1805년 글 서문의 첫머리는 이 기록을 근거로 앞으로 두말하지 말라는 충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당론에 의해 사도세자가 희생되었다고도 하고, 병이 없는데도 죄가 있어서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니 이는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어려서부터 부모와 격리된 채 불길한 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상황, 태생적으로 영민하거나 민첩하지 못한 성격, 영조의 편집증적인 완벽주의 속에서 항상 질책과 책망을 받으면서 성장한 과정과 그 속에서 자라난 마음의 병과 정신의 어긋남 등이 서로 악화를 부추겨 사도세자를 정신적으로 병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글의 흐름 자체도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부터 점차 병들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묘사가 절절한데, 사람의 성격과 특징들이 매우 잘 드러나도록 서술한 부분들을 읽고 있노라면 머릿속에서 그 인물들의 표정까지 떠오를 정도이다.


  영조께서는 영명 인효하시고 꼼꼼히 살피시며 재빠른 성품이시고,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덕성은 거룩하시나 과묵하시고 행동이 날래지 못하시니라. 성품이 이처럼 다르시니 경모궁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부왕(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라. 평소 묻는 말씀에도 즉시 응대치 못하셔서 머뭇거리며 대답하시고, 부왕께서 나랏일에 의견을 구하실 때도 당신 소견이 없으신 것이 아니로되 '이리 대답하여 어떠할꼬, 저리 대답하여 어떠할꼬' 하시며 즉시 대답하지 못하여 영조께서 매양 갑갑해하시니, 이것이 또한 큰 원인이 되니라.
  경모궁께서 세수를 일찍 하시는 일이 없어 매양 오전 공부 시작할 때 사부가 들어온 다음에야 보채듯이 하시니라. 삼전 문안 갈 때도 나는 일찍 세수하고 무거운 머리장식도 올리고 바삐 옷을 입고 가려하되, 동궁이 앞서지 않으면 빈궁은 감히 먼저 나가지 못하는 법도로 인하여 매양 기다리고 있으니, 아이 마음에 '어찌 세수가 저리 더디신고' 고이히 여기며 병이신가 했노라.
  영조께서는... 말씀을 가려 쓰셨는데, 죽을 사(死) 자 돌아갈 귀(歸) 자는 모두 꺼려 쓰지 않으시니라. 또한 정무회의 때나 밖에 나가서 일 보시며 입으셨던 옷은 갈아입으신 후에야 안으로 드셨고, 불길한 말씀을 나누거나 들으시면 드실 제 양치질하고 귀를 씻으시고 먼저 사람을 부르셔서 한마디라도 말씀을 건넨 다음에야 안으로 드셨느니라.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을 하실 제는 출입하는 문이 다르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함께 있지 못하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하시니라. 이처럼 사랑과 미움을 드러내심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하시니라.


  물론 영조가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보다 친근하게 대해주고 벽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를 해주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조의 성격은 그 누가 보아도 편력이 심했으며 가히 친 아들을 대하는 태도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질책이 난무했고 모든 헤아림을 거부했다. 비록 사도세자가 영민하지 못하고 실수가 많고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세손으로 결정한 이상 조금 더 살뜰하게 키워주었더라면 뒤주에 들어가 죽는 지경까지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집 잘되는 것을 기뻐마소서


  한중록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의 권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모여들고 흘러가는지 그려볼 수 있다. 당시의 권력이라는 것은 한쪽으로 몰리면 그것을 분산하기 위한 시도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갈망했으며 서로 쟁취하려 했다. 한중록의 인물들은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던 시절, 관료들은 백성 대신 임금에게 인정받아야 했고 그 총애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 한정된 총애를 나누어 가져야 하니 언제나 암투가 일어났으며, 총애나 신임이 편중되어 있었을 경우 수혜자는 언제나 상대방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역시 이러한 수혜를 노리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영조 편에 서있던 사람들도 사도세자가 죽었을 경우와 그리고 반대로 죽지 않고 왕위를 물려받았을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혜경궁홍씨는 이러한 역학관계를 실타래 풀듯이 하나하나 풀어서 구별하고 있으며, 본인의 아버지 및 친정이 영조의 지나친 신임으로 오히려 반대파로부터 화를 입었다는 것을 비교적 길고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척리이면서도 영의정까지 지냈던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견제세력과 반대편에 의해서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혜경궁홍씨는 한중록 전체에 걸쳐서 이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해명하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파적 입장들은 어느 한 편에만 서서 볼 수 없으니, 책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당파와 척리간 합종연횡의 진흙탕 싸움 속에서 혜경궁홍씨의 친오빠인 홍낙인이 집안의 번성함을 우려하여 차분하게 조언하던 부분은 여러 가지를 함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왕실의 인척으로서 조정을 떠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조물주의 시기함을 헤아리지 않다가 결국 집안이 엎어지기에 이르니, 그 근본인즉 부귀에 물든 것이니라. 벼슬이 어이 두려운 것이 아니리오.
  "집을 보전하려면 음직으로 주부나 봉사 따위(조선시대 처우가 낮은 하급관리)의 하찮은 관직이나 맡는 것이 복을 길이 누리는 것이니, 마누라(대화의 상대방을 높이는 말)께서는 본집 잘되는 것을 기뻐 마소서"




'영조'같은 아버지 VS '사도'같은 아들


  사람들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비극이 왕실처럼 폐쇄된 곳에서 일어나는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수 있겠으나, 두 당사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라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그 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영조와 같이 후계자나 후손에 대한 집착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훗날의 실수를 막으려는 고집을 갖게 될 경우,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온갖 장애와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일구어내었다면 그는 철옹성 같은 관념과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약한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빈틈을 파고드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피해를 보기 십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5시간을 잘 때 본인은 4시간만 자야 하고, 다른 사람이 10시간을 일할 때 본인은 11시간을 일해야 안심하게 될 것이다. 단점이나 약점을 파고들 경쟁자가 도처에 널려있으니 그것을 극복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영웅들이나 리더들은 보통 그렇게 만들어진 가치관을 더욱 공고하게 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힘을 키우는 것이므로, 주변 누구도 그 영역을 침범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사도 같은 아들은 어떠한가. 불안한 씨앗을 가까스로 지켜내어 나약함을 극복하고 견고하게 자기의 성을 만든 영조와는 달리, 유복함의 끝판왕인 왕가의 아들로 경쟁없이 태어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성장하였다. 개척자들에게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어린 시절의 결핍과 실패 같은 것이 주어지기는 커녕, 그 시대에 흔하지 않은 고도비만이 생길 정도로 먹을 것에 치중하고 탐닉하였다. 몸은 점점 비대해지고 행동은 둔해졌으며 주변에 널린 산해진미와 내인들의 비호 아래 견제 없는 성장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몸으로 과연 다리를 구부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글을 읽을 수 있었을까? 


  힘들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완성한 철인이 보기에, 그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에서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식과 무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아들의 모습은 한심하고 처참했을 것이다. 승정원 일기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뚱뚱하고 거대해진 몸은 영조로 하여금 '게으름', '나태'와 같은 인식이 생기도록 했을 것이고, 영조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고민과 걱정을 했을 텐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영조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마음가짐으로 아들을 대했음이 뻔하지 않았겠는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반대파와 실세들이 정통성을 구실 삼아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평생을 폐위 스트레스와 정통성 콤플렉스로 시달린 사람에게, 과연 느려터지고 밥만 많이 먹고 있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 관대하고 포용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 무리가 있지 않아 보인다.


  나는 영조의 입장을 간단하게 '완벽주의'로 해석한다. 그런데 그 완벽주의는 견제받지 못했다. 본인이 결정한 기준, 본인이 선택한 가치는 절대 바꾸려 하지 않았고 또 누군가에 의해 바뀌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편애하는데 그 기준에 들어맞았으면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기준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면 귀를 물로 씻어서 자신의 습관을 더욱 정당하게 만들었다. 보기 싫은 사람이 편애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둘을 일부러 갈라놓아 자신의 인식을 더욱 깨끗하게 표백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완벽주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도처에 깔려있다. 생계를 볼모로 하여 직장인들에게 최대의 이익과 복종을 요구하는 작은 회사에서부터, 대기업이나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왕자의 자리다툼까지 자세히 살펴보라. 그 누가 유교 경전 속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들먹일 수 있겠는가. 실수 한 번에 해고될 수 있고 미움을 샀다가는 생계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어마어마한 재산 앞에서는 툭하면 소송이요, 급기야는 살인까지 이어지니, 부와 권력 앞에서 그 누가 예의를 회복하고 인륜의 가르침을 찾는다는 말인가. 하물며 이것이 SNS도 없고, TV도 없고, 라디오나 신문도 없는 조선시대-지극히 폐쇄되고 극도로 예민한 왕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영조의 성격으로 치자면 참다 참다 도저히 안되어 400년 종사를 위협할 돌연변이를 제거한 것 정도가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조 같은 아버지를 만난 철부지 먹보 아들은 시간이 갈수록 비뚤어졌고, 자신이 그 무슨 행동을 해도 바뀌지 않을 아버지의 시선과 마음은, 사도로 하여금 가능성이라는 실마리가 이미 끊어졌다는 상실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본인이 무슨 해명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절대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오히려 아버지가 하는 말을 반대로 받아쳐서 거꾸로 자박(自縛)하는 지경까지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경모궁(사도세자)을 뜰에 세우시고 술 먹은 일을 엄히 물으시니, 경모궁께서는 진실로 잡수신 일 없건마는 두려움이 과하셔서 변명도 못하는 모양이라. 영조께서 계속 몰아세우시니 할 수 없이 "먹었습니다" 대답하시니라. "그 술을 누가 주더니?" 물으시니, 댈 데가 없어 "밧소주방 해정이가 주더이다"하시니, 영조께서 땅을 두드리시며 "네 이렇게 금주령이 엄한 때에 술을 먹어 막되이 구느냐" 엄책하시니라. 이에 경모궁의 보모 최상궁이 영조께 아뢰기를 "술 잡숫는다는 말씀은 지극히 원통하오니 술내가 나는가 맡아보소서" 하니, 그 상궁 아뢴 뜻은 술이 들어온 일이 없고 잡순 바도 없으니 차마 원통하여 그리한 것이라. 그랬더니 경모궁께서 최상궁을 꾸짖으시며 "먹고 아니 먹고 간에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다른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 하시니라.




우리 고전 언어의 아름다움


  원본 한중록은 옛 한글로 쓰였으나(이본들 중에서는 일부 한자로 쓰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과는 차이가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기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문학동네(정병설, 2010)의 역본을 추천한다. 독자들이 문맥을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현대어로 알기 쉽게 풀어썼으면서도 우리 옛 한 글의 아름다운 어조를 그대로 살렸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소리 내어 읽고 싶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TV 사극에서만 들어오던 경어체들이 본문에서도 그대로 살아나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지위와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왕가에서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지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언어를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는 어떠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우리의 선조들이 간직했던 말과 글의 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한중록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 


  보통 조선시대 사극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은 조선왕조실록을 골자로 하지만, 영조와 사도세자의 내용을 다룬 대부분의 사극은 '한중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송강호-유아인 주연의 영화 '사도(思悼)'의 경우도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먼저 읽고 난 후에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자체는 뛰어난 촬영기술과 미술 효과를 접목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일부 장면들에서는 극적 효과를 위하여 원작이 다소 변형되기도 하였으나(인원왕후가 영조의 전위를 허락하는 부분이라든지 삼정승이 죽는 부분 등), 대부분의 중요한 전개들은 철저하게 역사적 고증이 반영되었다. 한중록에는 거론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살려낸 것을 보면, 아마도 감독은 한중록 이외에 '임오일기', '모년일기', '현고기' 등의 다른 사료 및 전문가들의 의견도 적극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게 된 원인과 그 날의 분위기, 또한 여러 인물들의 심리를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캐릭터와 관련한 개인적인 아쉬움을 덧붙여 보자면, 영조는 아마 송강호 배우보다 조금 더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이었을 것 같고, 사도세자는 유아인 배우보다 훨씬 더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인상이었을 것 같다는 정도가 아닐까.



  우리가 옛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잊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는 순간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과 기록은 그러한 시간여행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의 이름 모를 선조의 역사가 아름다운 기록과 언어로 개개인과 연결되는 경험은 소중하다. 한중록을 읽으면서 말(言)의 경건함과 엄밀함을 새삼 깨달았으며,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자취를 더듬어보고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옛 성인들이 이야기했던 그 상우천고(尙友千古)의 기쁨이 아닐런지...






참고자료

한중록 및 원본 한중록 / 문학동네 / 정병설 옮김 / 2010

권력과 인간 / 문학동네 / 정병설 / 2012

한국고전문학수업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정병설 / 2019

영화 사도 / 이준익 감독 / 2014

설민석의 영화'사도' 해설 - 유튜브

요즘책방-책 읽어드립니다. 25화 - 다시보기링크(유료)

조선왕조실록 - 영조38년 윤5월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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