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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n 30. 2020

금각사 / 미시마 유키오 / 1956


  혀를 내두르게 하는 정밀한 논법. 사무라이의 칼날을 연상케 하는 필력. 눈이 돌아가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있다. 길을 찾는 새는, 이름 모를 발자국을 따라갔지만 난데없이 그 길은 그 새의 뒤통수에 이어져 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 무엇이 희극이고 무엇이 비극인가. 작가는 위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위를 보고 있는 것인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차근차근 호흡과 질서를 쌓아가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것이 거꾸로 허물어져가고 뒤틀려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독자는 미의 해체를 위하여 벽돌을 쌓고 있으나, 작가는 미의 완성을 위하여 벽돌을 허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 앞뒤가 연결된 순환고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는 목이 계속 꺾여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안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들어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버렸다.


  가끔은 그러한 왜곡과 뒤틀림, 그리고 파괴를 통해서 폭소조차 유발된다. 우리가 가졌던 고정관념과 관성적인 가치관이라는 것들이, 망가진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단숨에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무질서와 파괴 혹은 뒤집기를 찬양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그것을 추구하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다가가야 할 이상향, 바라보아야 할 상징, 추구되어야 할 지고의 아름다움이 모두 파괴 되고 무너짐으로써 결국 완성되는 기이한 논리를 깨닫게 된다.


"왜 대답이 없어? 벙어린가, 자네는?" 
"마, 마, 마, 말더듬이입니다."
하고 숭배자 하나가 나 대신에 대답하자,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비웃음이란 얼마나 눈부신 것인가! 나에게는 같은 반 소년들의, 소년 시절 특유의 잔혹한 웃음이, 눈부시게 빛나는 무성한 나뭇잎처럼 찬란하게 보였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그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천재이다. 제국주의로 상징되는 쇼와(昭和)시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엘리트 가문의 허약한 아이로 성장한 그 불안한 씨앗. 정신과 육체의 탐미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본인의 인생을 자신의 작품 속에 집어넣고 그것에 의하여 들씌워진 길을 갔던 사람이자, 심지어는 본인이 죽는 것까지 모두 계산한 남자. 뒤틀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자기 자신의 소설 속 패잔병이 되어 소멸한 주인공. 노벨문학상의 반열에 올라와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으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결한 돌연변이.


  '금각사'는 그러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1950년 발생한 금각사 방화사건에 관련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을 투영하여 그 독창성을 마침내 폭발시켰다. 말더듬이로 상징되는 결핍된 자아상은, 미에 대한 질투와 탈출 그리고 막연한 욕망의 완성과 그 보상을 위하여 그 대상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탐미주의 작가의 방랑은 결국 정점에서의 소멸 같은 결과를 암시해준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완전하고 지극한 이상을 파괴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파괴와 죽음을 통한 미의 완성'이라는 굴레 속에서 그는 그와 똑같은 인생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아마도 미(美)는 그 모두이리라. 세부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며, 금각이기도 하고 금각을 에워싼 밤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전부터 나를 고민하게 하던 금각의 미에 대한 불가사의는, 거의 해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세부의 미, 그 기둥, 그 난간, 그 시토미도, 그 판당호, 그 화두창, 그 보형조의 지붕...... 그 법수원, 그 조음동, 그 구경정, 그 수청...... 그 연못의 투영, 그 자그마한 섬들, 그 소나무, 그 선박장에 이르기까지 세부의 미를 점검하면, 미는 세부에서 끝나 세부에서 완결되는 일이 결코 없이, 어느 한 부분에도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미의 예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부의 미는 그 자체가 불안으로 가득하였다. 그것은 완전을 꿈꾸면서도 완결을 모른채, 다음의 미, 미지의 미로 유혹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감은 예감으로 이어지고, 하나하나의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의 예감이, 소위 금각의 주제를 이루었다. 그러한 예감은, 허무의 징조였던 것이다. 허무가 이러한 미를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미의 이러한 세부적인 미완성에는, 저절로 허무의 예감이 포함되어, 가느다란 나무로 만든 섬세한 이 건축은 영락(瓔珞)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허무의 예감에 떨고 있었다.


  그는 생존해 있었어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면의 고백'을 발표하면서 이미 본인의 동성애 성향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태생적으로 허약한 육체를 변신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운동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보란 듯 군국주의를 찬미하였다. 더 나아가 전범의 이력이 있는 천황폐하를 친위하는 비밀결사대까지 만들었다니, 그의 삶은 어차피 기울어진 그래프였다.

   

  금각사는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방법에 대한 매우 신선하고 고차원적인 접근이며, 상식을 뒤엎는 센스로 가득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작가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금각사를 읽으면서 천재성의 허무를 느낀다.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인문학의 엄중한 책임의식을 한낮 어린애 장난 같은 병정놀이로 여겼다니, 참으로 허탈한 안타까움이 있다. 마치 속이 비어 껍데기만 남은 진주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 진주를 손에 쥐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저 허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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