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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Dec 12. 2020

산에는 꽃이 피네(법정) / 류시화 / 1998

  깊고 단단한 뿌리를 가진 나무가 지상의 모진 풍파와 사계절을 아무런 문제 없이 견디어내는 것처럼, 침묵의 힘으로 깊은 뿌리를 만든 한 노승의 마음가짐이 차근차근 단단하여져서, 귀를 여는 자에게 화석처럼 그 신비를 드러내는 느낌이 있다.


  '침묵의 메아리'라는 말이 바로 그러한 느낌일까. 아무런 말없이 오랫동안 가만히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천천히 돌아서는 자의 모습에서 그 어떠한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힘과 진동을 느낀다. 욕망을 탐하고 속도에 무뎌져 있는 이 시대가 간과하고 있는 그 무엇.


  부와 명예, 물질과 쾌락으로 채워진 마음 한 구석이 어느 순간 공허해지고 허무해질 때, 우리가 바라보고 귀를 기울여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이 책은 법정 스님의 각종 강연과 법문 등을 비롯한 모든 발언 등을 '류시화 시인'이 모으고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법정 스님 자신이 직접 집필한 책은 아니지만 그분의 생각과 글,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으니 오히려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그의 인생과 가치관 전체라고 봐야 한다. 평생 무소유와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며 실천해온 수도자의 가치관이,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시인을 만나서 빛을 발하였다. 글 한 자 한 자를 읽을 때마다 여백의 휴식이 있고 명상의 시간이 주어진다. 아득한 눈 위에 남겨진 이름 모를 발자국을 조금씩 따라가다 보면 맑고 청명한 사색의 숲으로 따라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너무 외부적인 것, 외향적인 것, 표피적인 것, 이런 데만 관심을 갖다 보니까 마음이 황폐해졌다. 옛날보다는 훨씬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들은 더 허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나는 수많은 역사적인 책들과 여러 유명인들의 글들을 접하고 또 접할수록 지식과 의식이 쌓이고 채워지면서 심장이 고동치는 풍요의 사치를 누리지만, 법정 스님의 글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라는 존재가 가라앉고 차가워져서 내 속을 들여다보는 공(空)의 경건함을 느끼게 된다. 없음과 마음의 가난함, 그리고 청빈과 검소의 의미 자체가 되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떠한 노승의 소박함에 나는 그야말로 차디찬 눈 밭에 가라앉은 푸석푸석한 낙엽 같은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의 부침을 겪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감정의 기복을 경험할 때면 나는 고요하게 나의 하루를 보장받고,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는 구석을 찾아서 법정 스님의 글을 하나하나 곱씹어 본다. 그러면 내 안에 느림의 속도가 찾아오고 그 속에 차분한 시간들이 쌓이게 된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수 없이 많은 재물과 욕망과 분노와 쾌락의 파도를 넘나들면서 마음은 피폐해져 가고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어갈 때, 법정 스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본보기 삼아 필요 없는 물질을 걷어내고, 텅 비어있는 공간에 조용히 앉아서 말을 하지 말고 침묵으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라고 조언한다. 돈과 일상과 생계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우리가 과연 검박한 승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기회가 있기나 할까?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칠수록 검박하고 처연한 현자의 뒷모습이 계속 아른거리기만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건 허욕이다.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몇 해전에 중국 대만에서 유학하는 스님이 내가 작은 것을 좋아하는 줄 알고 조그만 다기를 하나 사 왔다. '선(禪)'이라고 음각되어있는 아주 작고 깜찍한 물건이었다. 다기는 크면 안 좋다. 손안에 들어와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아주 좋아하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많이 사용했다. 그 뒤에 내가 인도로 일본으로 다니다가 대만에 갔더니 육교 밑에서 잔뜩 놓고 팔고 있었다. 그래서 선물하려고 몇 개 사고 다시 내 몫으로 부처 '불(佛)'자를 쓴 것으로 구했다. 그걸 가져와 내 거처에서 쓰는데 처음 하나 가져왔을 때의 그 소중함, 그 살뜰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니까 그 마음이 다시 회복되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 그립고 보고픈 인간 본연의 그 진리를 찾게 해 주는 한 현자의 발언들 속에서, 내가 깨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인생을 두고, 평생을 곱씹어볼 가치 있는 글로 가득한 보석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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