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부터, 노량해전으로 전사한 1958년 11월(양력 12월)까지, 각 연도별 간지를 제목으로 하여 개인적인 전쟁 중의 일기를 기록하였다. 그 일기들의 친필 초고 표지 제목은 각각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이다. 인조(仁祖) 임금은 1643년 이순신의 공을 기리는 의미에서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1795년 정조(正祖) 임금 때에는 윤행임과 유득공 등이 왕명에 의하여 이순신 장군의 일기와 임진장초(전쟁 중 임금에게 보고하던 문서의 초본), 서간첩(편지글) 등을 한데 엮어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게 되었다. 당시 교정 중 임시로 정한 이름이 '난중일기'였으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순신은 무인(武人)이다. 무인은 선비가 아니고 장수이다. 장수란 책상에 앉아서 경을 외우고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적진에 나가 싸우는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문과를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성인이 된 이후 전향하여 무과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수년을 노력하였으며, 무인의 지위와 무게를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장수가 전쟁 최전방에서 무려 1595일 치나 되는 일기를 남겼다면 그냥 덮어둘 일은 아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년 이전부터 이미 일본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비하고자 마음을 먹고 작성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난중일기는 임진년 1월 1일부터 시작이 된다. 일기의 내용은 대부분 날씨와 전쟁상황 요약, 물자와 식량의 문제, 여러 장수 및 관리들과의 협의내용, 군수품 관리, 범법자 처벌 및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주를 이룬다. 덧붙여 이순신 장군 본인의 건강문제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 가족에 대한 염려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날씨는 매번 일기의 가장 첫머리에 항상 기록되어 그 영향을 받는 수군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삼도를 관장하는 통제사의 자격으로 신경 쓰기에도 벅찰 정도로 수많은 말단 관리들과 심지어 종의 이름들까지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의 글에는 대부분 군더더기가 없다. 그 날 일어난 일들을 무겁고 간결하게 기록한다. 불필요한 수식어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문장이 짧게 끝난다. 맑거나 흐린 날씨, 탄환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던 사건, 관리가 문안인사를 오는 일, 아무개가 미역을 따오는 행위, 부정한 자가 곤장을 맞았던 기록, 지인들과 화살 쏘기 시합을 했던 결과, 수많은 범법자의 목을 베는 장면들이 건조한 사실들로 서늘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자의 냉정함을 느끼게 한다. 병사들이 마련한 곡식의 1되, 청어의 1 두름까지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사실을 파악하는 자의 객관성을 느끼게 한다.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량 준비, 징병, 작전, 전함 제작, 처벌, 진지구축 등을 모두 처리해야 하는 피곤함과 엄중함이 문장의 도처에 서려있다. 마치 칼로 문장을 베어 낸 듯한 살기와 처연함이 느껴진다.
1592.6.2 맑다. 아침에 떠나 바로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줄을 서서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적의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였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 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이 놀라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 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1594.2.16 맑다. 아침에 흥양 현감과 순천 부사가 왔다. 흥양 현감이 암행어사의 밀계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 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때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또 그 가운데 '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일과 장정 넷 가운데서 장정 둘을 전장에 내보내는 일'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간신의 상징)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1594.11.12 ... 견내량에서 제멋대로 방어선을 넘어가서 고기잡이를 한 사람 24명에게 곤장을 때렸다.
1595.10.21 맑다. 이설이 휴가를 신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596.7.28 맑다. 종 무학, 무화, 박수매, 우놈쇠 등이 26일 왔다가 오늘 돌아갔다. 늦게 충청 우후와 함께 세 가지 종류의 화살을 쏘았는데, 쇠화살이 36분, 편전이 60분, 보통 화살이 26분, 모두 1백 23분이었다. 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고 하니 매우 걱정된다.
1597.8.25 ... 당포의 포작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와서 잡아먹으려고 거짓으로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들을 잡아오게 했더니 과연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렇게 해서 군중의 인심은 안정시켰으나 배설은 벌써 도망쳐버렸다. 거짓말을 한 두 사람의 목을 잘라 매달아 널리 보이게 하였다.
이순신의 건강은 평소에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기에서도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본인의 건강을 기술하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주로 잠을 잘 때 식은땀을 많이 흘렸고, 아침에는 일어날 수도 없어서 관리들의 문안인사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의학적으로 여러 가설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평소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거니와, 임진년 5월 사천 전투에서 어개에 맞은 총상이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의학기술이 미비한 시절에 총을 맞았으니 제대로 된 처방을 받았을 리 없었겠고, 전쟁 중에 상처를 누르던 갑옷을 벗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분(이순신의 조카)의 행록 및 유성룡의 징비록 등에 기술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생살을 칼로 찢어 두어 치가 넘는 깊이에 박힌 총알을 빼내었다고 하니 글을 읽는 우리는 그저 짐작할 따름이다.
1592.4.3 맑다 기운이 떨어지고 어지러워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렸다
1592.5.29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노량해전)
1593.5.18 맑다 아침 일찍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1593.8.12 몸이 몹시 불편하여 누워서 하루 종일 끙끙 알았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서 옷을 적셔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진주성 함락, 아들 염의 건강, 원균의 모함 등)
1594.3.7 맑다.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랫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 꼴이 말이 아니었다.
1594.4.26 맑다. 병세가 매우 심해져서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596.3.17 밤에 식은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았다 (3월 내내 밤새도록 식은땀이 흐르고 괴로워 신음하는 날이 연속된다)
한편 충무공의 글을 읽다 보면 도처에 피와 죽음이 서려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것은 죄인이나 적의 목을 베는 외부적 잔혹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 혹은 무능한 조선 관리들 및 조정과의 불신관계 같은 내부적 갈등관계 같은 것일 것이다. 가끔씩 이순신은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에 대한 불만과 서러움을 일기에 토로하고는 하였는데, 어찌 보면 피로 물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막상 죽음의 소용돌이가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무인에게 일기로 표현하기 힘들고 구차했을 것인데, 주변의 상황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순신의 빠른 승진을 가로막는 조정의 세력들, 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통제권을 갖게 된 이순신을 경계하는 임금의 시기심, 개인의 이익을 누리면서 공을 가로채려는 부정한 관리들은 사실 아군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무인으로 감내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속으로 삼켰으며,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모함을 받는 상황들을 부질없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았다.
1593.5.14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가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다.
1593.8.2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1594.8.30 김양간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그가 영의정(유성룡)의 편지와 심충겸(병조판서)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화를 내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 수사의 일은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천년을 두고 한탄할 노릇이다.
1597.7.21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했던 상황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1597.8.12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1597.8.30 늦게 배설이 적이 많이 몰려올까 두려워 도망가려고 하기에 그 관하의 여러 장수들을 데려오려고 하였다. 나도 그 속마음을 잘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택할 방법이 아니어서 참고 있었다.
1597.9.15 맑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1597.9.16 ...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통영 출신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그분의 성품은 쉽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며 무인답지 않게 사색적이고 다소 초췌한 모습의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설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은 이순신의 글에 대하여 치열한 기록정신으로 빠뜨리지 않고 중언부언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으며, '무인적 에토스'를 느낀다고 하였다. 또한 문학평론가 황종연은 이순신의 일대기를 '원시적 파토스'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몸을 던져 전쟁을 치르는 육체의 원초성과 수십수백의 잘린 머리가 나뒹구는 피바다의 잔혹함이 그대로 역사의 사실이 되는 시대가 결국,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눈을 갖는 장수를 필요로 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또한 가족을 사랑한 무인이었다. 평소에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있었으며, 진중에서도 아내와 아들들의 병에 대하여 걱정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충무공 어머니의 사망에 대한 부분과 아들 면의 사망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싶었으나, 글로 옮겨 오기에는 한계가 있는 슬픔이라고 생각하여 인용하지 않았으니 시간을 갖고 꼭 직접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천운(天運)이나 무운(武運)을 바라지 않고 행동한 장수였으나 우리가 이러한 장수를 소유했던 것은 천운이었다. 임진왜란의 전황과 왜의 공격 경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순신이 전라 해안을 방어한 것이 어떠한 목적이었으며 옥포, 한산, 명량, 노량에서 싸운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사람이라면 이순신의 육필을 다시 체감해보고, 그 뜻을 되새겨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시대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순신 장군이 선조 임금에게 직접 올린 별도의 장계(1597년 9월, 선조는 원균의 패배로 취약한 수군의 상황을 우려하여 권율의 육군과 힘을 합쳐 육지에서 싸우라고 이순신에게 권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이 답신한 내용임. 최초 부산을 통하여 충청도를 지나 한양 및 평양으로 진군한 일본군의 식량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일본은 당시 전라도를 빼앗고, 남해를 돌아 서해 인천으로 접근하여 식량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부분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곡창지대인 호남을 사수하고 서해로 통하려는 일본군을 막으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는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그분의 의지와 성품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 임진년으로부터 오륙 년 동안 적들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로 바로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지금 만일 수군을 전부 없애 버린다면 이는 곳 적들이 크게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호남을 거쳐 한강까지 곧바로 쳐들어갈 터인데,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왜란이나, 이순신 장군 및 조선수군, 의병의 대한 역사적인 내용은 셀 수도 없이 다양하고 많다. 그것은 난중일기 이외의 여러 가지 사료를 참고하고 공부해야 퍼즐이 맞추어진다. 대부분의 퍼즐을 맞추어졌을 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순신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 시간을 살아가는 의미를 다시금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음력 11월 당시의 수정 선조실록을 끝으로 난중일기의 감상문을 마무리한다.
유정(劉綎)이 순천(順天)의 적영(賊營)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行將)이 순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린(陳璘)과 해구(海口)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泗川)의 적 심안돈오(沈安頓吾)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賊船)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南海)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인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인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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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