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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Jul 02. 2020

나는 어떻게 꼰대가 되었는가.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게다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관찰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선을 넘은 70년대 생들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쉽게(?) 정의 내릴 것이다. '인생이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며 쉽고 빠르게 흘러가버려 절대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정확한 정의라고 말이다. 그들은 변화를 당한 것인가, 혹은 변화를 시킨 것인가?


  사실 2천 년 전 이집트에서도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다르게 버릇이 없다는 소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혜경궁 홍 씨도 당시 같지 않게 본인 어렸을 때에는 왕실의 법도가 지엄했다는 푸념을 하고는 했단다.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되며, 자신만이 온통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 같은 고집. 


  꼰대라는 말은 사실 곯(꼰)아터진 (대)가리 라는 뜻이다. 뭐 개인적 농담이지만 왠지 그렇게 믿고 싶어 진다. 물론 정확한 원뜻은 없으나 어쨌건 나이 많은 늙은이를 지칭하는 속어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나이 좀 들었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잔소리를 하고 유연함이 없는 일방적인 조언이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 같다. 이리되었건 저리 되었건 결국 좋은 뜻이 아니다.


  나는 황송하게도 사람들이 말하는 꼰대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조금 이를 수도 있지만, 요즘 세상은 아이돌 문화를 바탕으로 마네킨 처럼 이쁘고 몸매가 길쭉한 젊은 사람들이 주도해가는 세상 아닌가. 그러니 40대 중반 정도 되면 어쨌건 유행의 주류는 아닌 셈이다. 주류가 아니면 밀려나게 되어있고 옆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입장이 생긴다. 본인이 몸소 흐름에 몸을 담가 허우적거리는 처지가 아닌, 옆으로 밀려 나와 그 흐름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되는 입장. 거기에서 인식의 변화가 생긴다. 행동보다 관찰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히 뇌와 입이 뻐근할 수밖에.


  보통 40이면 불혹이라고 해서 세상일이나 어지러운 것들에 미혹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알 거 제대로 다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40이 넘으면 머릿속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혹은 제대로 된 것이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건 간에 아는 것이 쌓이게 되어있다. 이는 잔소리를 하기에 최적의 준비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병사가 군대에서 지독하게 훈련하여 어느 순간 총을 가질 수 있게 되고 탄약까지 지급을 받게 되었다면, 전역할 때까지 사격을 한 번도 못하는 불쌍사를 겪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꼰대의 입장과 처지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머릿속에 지식과 경험과 연륜이 조금 쌓였는데, 얼굴에 입이 달렸으니 이제 그곳으로 무언가 배설될 준비가 된 상황. 참으로 긴급(?)하다고나 할까.


  20세기 초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도 경복궁 앞 육조거리와 63빌딩을 모두 직접 둘러보았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꿈같은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1970년대 생들이다. 그들은 올림픽 세대이며 경제개발의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하였고 민주화의 탈바꿈을 직접 이루어내었다. 그뿐 아니라 아날로그로 상징되던 기술의 시작부터 디지털로 상징되는 발전과정의 전체에 고스란히 참여하였다. 필름 카메라를 처음 구입하여 지금은 디지털로 사진을 찍고 있으며, 한판에 50원짜리 동네 오락실에서 너구리를 하고 난 이후 지금은 폰으로 리니지를 한다. 비디오를 빌려보기 위해서 이 동네 저 동네 뛰어다니던 노력이 마침내 이제 영상이 사람을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들은 저축을 하기 위해 은행에 직접 가서 발품을 팔던 것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몇 번의 손가락질만으로도 거금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5.25인치 디스켓이 손상될까 봐 조심스레 보관하던 버릇을 발전시켜 손톱만 한 메모리칩 속에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집어넣을 수도 있게 되었다.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 정류장에 서서 마냥 기다리던 그들은 이제 자신이 타야 하는 버스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도착하는지도 다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대 변혁의 첫차를 우연히 얻어 타고 그 출발선의 경험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변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모두 쌓아온 것이다. 이들은 과거와 단절되지 않았고, 미래로부터 소외당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어져있다. 이들은 여전히 사회경제의 주축이며, 한 손에는 5.25 디스켓과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목격자이자 중간인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는 그 쇠퇴와 함께 이후 세대와 단절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70년대생부터는 단절이 잘 되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단절하고 싶어도 그러할 수가 없다. 지금의 사회는 한 세대만을 위한 기술이 아닌, 기술 그 자체를 위한 발전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술이 발전하면 그 세대는 복과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제조사들의 경쟁과 돈벌이, 그리고 경제 독과점 권력을 위한 발전이 시작되면 사람은 별로 이익을 볼 수 없고 기술 그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고 이익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 지금의 현실이 그렇다. 세대가 복을 누리고 피드백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지갑만을 열도록 기술적 수치 경쟁에 몰두할 뿐이다. 지인들끼리 가볍게 웃고 즐기고 공감하기 위해 인스타 그램에 올릴 즐거운 사진 한 장을 위해서, 나는 왜 천만화소의 카메라가 달린 비싼 폰을 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방직기계가 돌아가고 고무신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웃었지만, 지금 이 시간에 어느 기업에서 이천만화소 삼천만화소의 카메라를 개발한다고 한들 그것이 나의 미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느 순간 차가 하늘을 날고 내 몸속에 칩이 내장되어 100년을 넘게 산다고 한들 그것이 나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과거의 기억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기술도 강제적으로 체득해야 하는 팔방미인의 세대. 그것이 바로 70년대 생들이다.


  이러한 70년대 생들은 과거의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고 깨달은 것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이후 태어나거나 다가오는 젊은 사람들에게 통화 아이콘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파일을 저장할 대 사용하는 아이콘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적 가치의 역사와 쟁취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고, 번거롭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최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부모님 세대가 우리에게 해주는 말에는 번역기가 필요하지만, 현재 우리는 번역기 없이 이후 세대에게 대화를 요청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기 없이 잔소리할 수 있는 우리가 과연 꼰대의 자격을 충분히 얻은 것인가?


  자, 여기 준비된 꼰대가 있다. 비록 겸손하지는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를 아끼고 걱정하는 초조하고 겁 많은 꼰대가 있다. 탄환은 준비되어 있고 총은 장전되었다. 잔소리를 듣던가 듣지 않던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꼰대가 싫다면 스스로 꼰대가 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잔소리를 들어줄 또 다른 꼰대, 누구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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