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은 낮지만, 넘기엔 높다

보험체크, 예약, 동의서 : 진짜신뢰는 절차에서 시작된다

by 실버버드

미국에서 클리닉의 문턱은 낮다.
누구나 전화할 수 있고, 예약도 열려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턱을 ‘조용히 잘’ 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환자에게서 “치료받고 싶다”는 전화가 오면
가장 먼저 진행하는 것은 베리파이(보험확인, Verification) 절차다.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시간을 거치며,

진짜 치료가 결정된다.


미국의 보험은 한국과 달리 민영보험 체계에 있다.
오바마케어든 아니든, 모든 보험은 사전에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다.

본인이 원하는 치료가 커버되는지,
일 년에 몇 번 방문 가능한지,
보장에서 제외되는 디덕터블(공제액, Deductible) 금액은 얼마까지 적용되는지,

매 방문 시 지불해야 할 코페이(본인부담금, Copay)는 얼마인지.

최종적인 보험료 지불은 어디서 하는지,
이 모든 항목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사실 미국은 민영 보험만 해도 종류가 10여 가지를 훌쩍 넘는다.
여기에 워컴(Worker's Comp)이라 불리는 직장상해보험,

교통사고 및 개인상해보험(Personal Injury Protection)까지 포함하면
그 종류는 훨씬 다양해진다.

보험마다 리퍼(의사 추천서, referral)를 요구하는 방식도 다르고, 청구 처리 방식도 다르다.

개인 보험의 경우에는
인네트워크(In-Network)인지
아웃오브네트워크(Out-of-Network)인지에 따라

청구 방식도 달라진다.

따라서 보험 베리파이는 시간이 걸리고,

기다림이 필요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환자는 이 절차를 이해하고

보험증 정보를 보내주고 결과를 기다린다.

하지만 간혹, 이 절차에 불만을 표현하거나 거부하는 환자도 있다.


요즘은 많은 보험사들이 온라인 시스템을 갖춰
베리파이 과정이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하지만 불과 5~6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직접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 할 때가 많았고,
그 ‘간단한’ 보험보장내용을 확인하기까지

30분, 길게는 1시간을 훌쩍 넘게 기다리는 일도 흔했다.


그래서 나의 클리닉에서는 환자에게
보험 확인에 여유 있게 1~2일 정도 소요될 수 있다고 안내한다.

수많은 환자들의 보험 확인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환자 진료와 병행해야 하므로

업무 시간 배정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차분히 기다려주며 베리파이가 끝나고
예약까지 잘 마치는 환자는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내원에 정성을 들인다.
한 번 치료를 시작하면

꾸준히 내원하는 환자가 되기도 한다.


반면,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환자일수록,

치료도 잘 안 되고
치료 장소도 자주 바꾸는 경향이 있다.


처음 내원하면

환자는 의료 히스토리, 개인 정보, 각종 동의서 등을 작성하게 된다.

그 양은 한두 장이 아니다.
그런데 서류작성에 불만을 갖거나

과정을 대충 넘기려는 환자치고
좋은 환자가 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또한, 동의서 내용을 의심하거나,
자신이 내야 할 코페이 금액이 맞는지 여부를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환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환자들은

치료를 꾸준히 이어가지 못했고,
결국 회복도 더뎠다.


병원은 의료법과 규정에 근거해 운영되는 공간이다.
정당하게 치료를 제공하고,

정당하게 진료비를 청구한다.

그런데 병원에 와서까지

신뢰에 인색한 사람은,

결국 본인도 신뢰를 받지 못한다.


진짜 신뢰는 절차로 시작된다.


주어진 절차를 묵묵히 따르고,
자기 몫을 정확히 수행하는 환자만이

신뢰를 주고,
신뢰를 받으며,
좋은 환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좋은 환자는 좋은 절차를 통과한 사람이다.
절차를 존중하는 사람이, 신뢰받는 환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