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램프가 선물한, 좋은 환자와 나쁜 환자

진료실에서 배운 '선긋기’의 기술

by 실버버드

3화에서 언급한 적 있는

‘2년만' 버티면 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음속 요술램프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그런데, 그 담당 회계사의 마법 같은 주문은

희한하게도 정말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료 한의사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 끝에
“다들 어렵다, 오전 몇 시간이라도

특별한 치료 이벤트를 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됐다.


놀랍게도 그 치료이벤트가

몇 달 만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길에 나앉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도배되던 불황 속에서,

환자들이 기적처럼 몰려들었다.

침몰이냐, 자발적 하선이냐

기로에 서 있던 나의 한의원은

닻을 올리며 순풍을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환자가 늘기 시작하자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경험은 적고, 의욕만 하늘을 찌르다 보니,

'이 환자도 저 환자도 다 내 환자'라는 마음이 앞섰다.

지금은 영어권 환자들 위주로 찾아오고 있지만,

개원 초창기였던 그 당시에는 내 부족한 영어 실력 탓에,

환자 대부분이 한국어를 쓰는 이민자나 임시체류자, 관광객들이었다.


그런데, 이민자들 사이에서 씁쓸하게도 자주 듣는 말 하나가 있다.

"한국인을 조심하라."

나 역시 다른 초기 이민자들처럼,

같은 한국인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한국인들끼리는 정이 있으니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매우 안이한 생각이었다.

겉보기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임상경험도, 사람경험도 부족했던 초보 한의사에게,

누가 좋은 환자고, 누가 나쁜 환자인지

구분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닥터조, 지금은 이런저런 환자 다 받느라 정신없겠지만,
언젠가는 환자를 가려서 받아야 할 거예요."

25년간 한의원을 하시다 은퇴한

선배 한의사의 조언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오겠다는 환자를 안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맛에 의원을 하지.'라고 싶을 만큼

피로회복제처럼 힘을 북돋아 주는 환자도 있었고,

‘내가 돈도 받고 오히려 치료도 받는 기분’이 들 만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도 같은 환자도 있었다.

반면에,
수백 불어치 한약을 처방받고는

고의로 부도 수표를 내고 종적을 감추거나,

치료비로 위조지폐를 내밀거나,

심지어 치료를 잘 받고 간 다음 날,

'치료 때문에 뼈에 금이 간 것 같다'며

터무니없는 소리로 공갈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요술램프에서 '황당 종합선물세트'가 나왔던 거다.


이렇게 너무 다양한 수준의 환자들을

민낯으로 마주하다 보니,

마음이 회복되는 날보다 지치는 날이 허다했다.

그건, 치료자의 길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세상 물정도,

사람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숱한 시행착오의 시간 속에서

나는 중요한 걸 배웠다.


'내가 성장한 만큼, 좋은 환자도 나를 찾아온다.'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는
미련하게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더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잘 보내야 하고,

그리고, 질 나쁜 사람은

애초에 걸러낼 수 있는 장치를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서 배운

‘선긋기’의 기술이다.


환자를 사전에 필터링하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양의 클리닉에서는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환자는

능숙하게 이런 식으로 대응하곤 한다.

“예약이 꽉 차서 몇 주 후에나 가능합니다.
"몇 달 후에나 내원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의 클리닉은 다르다.
환자가 내원을 원하면 일단 오게 한 뒤,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미국 의료법상,

내원한 환자를 타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는 것은
전문직 윤리 위반이나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한의사는

특정 분야에 특화된 면허진료인(Specialist)이다.
내과나 일반 가정의처럼

1차 진료를 맡는 주치의(Primary Care Provider)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를 다른 기관으로 리퍼(추천)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실제 진료실에서 겪은 곤란한 상황들,

양방 병원이나 보험사 등 다른 기관들의 운영 방식을

꼼꼼히 살피며 절차를 정비하고,

경계를 차분히 세워 나갔다.


내가 미국에 와서 어쩔 수 없이 연습해야 했던

‘줄서기’를 통한 배움,

기다림 속에서 생겨나던

상호 존중의 감각과 신뢰감을 토대로 말이다.


그렇게 크고 작은 경험들을 밑천으로 삼아

나만의 시스템을 만들어

진료실에 천천히 적용해 나갔다.


그러자 해를 거듭할수록

좋은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건 하나같이,

그 시스템 안으로 묵묵히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내 진료실에서 머무는 관계들이

웃음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선긋기'는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자리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이다.


그 '마법의 주문'은 3화『좋은 가게는 오늘도 열려 있다』 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 실버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