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의사, 백세환자

(INT. 언젠가 나도 기네스북에?) : 정중한 거절과 선택권

by 실버버드

몸이 아프다 보면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

그래서일까?

진료실을 들어설 때,

몸의 고통보다 더 깊은

마음의 가시를 품고 오는 이들이 많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인 아픔으로 도움을 받으러 왔음에도,
자신의 나쁜 에너지를 전가하고,

말이나 행동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려 한다.

스트레스를 그렇게 해소하려는 듯 보일 때도 있다.


한때는 그런 환자들까지도 끌어안으려 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보람되고 좋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의사도 사람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병에 걸린다.
치료자가 아파서 무너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간다.


수년간 나에게 좋은 환자들을 보내주던,
‘마리아’라는 이름의 히스패닉계 내과 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리퍼를 해준 환자들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하며,
간호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경과노트(Progress Note)를 요청하던
참 꼼꼼한 의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환자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너무나도 세심하게 환자를 챙기던 좋은 의사였기에,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환자들에게 시달리며
환자 하나하나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가,
과중된 업무 스트레스를 몸이 견디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내 환자들이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당신은 빨리 떠나면 안 돼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내가 없으면 결국 환자도 올 수 없지.
내가 건강해야,
환자들에게도 좋은 치료를 오래 이어갈 수 있겠구나.’


올해로 나의 클리닉은 17년을 훌쩍 넘긴 중견 의료기관이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환자뿐 아니라
양방 클리닉, 워컴, IPA, 건강보험회사 등과도
영어로 유창하게 소통하며,

환자 의뢰도 꾸준히 받고

의료기록(Medical Record)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작성해

여러 기관에 제출하는 법을 익혀왔다.

쉴 새 없이 환자들의 문의가 오고,

내원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마리아' 의사처럼,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무 세심하게 매달리지 않으려 한다.

모든 환자를 내가 다 보려고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게 결국은

나와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환자를

더 성장되고 안정된 마음으로 진료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은 오히려,

환자에게 올바른 조언을 해 주고,
좋은 치료 기회를 다양하게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의무감을 더 많이 느낀다.


환자의 상태와 증상을 먼저 듣고
내가 감당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환자가 기대하는 치료는 무엇인지 짚어보고,
그 기대에 부합할 수 있는 부분과

미치지 못할 수 있는 점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권을

환자에게 건넨다.


선택권을 주면,
환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선택한 치료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치료 중간에 성과가 잘 나지 않거나
어떤 부분이 막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환자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부합하는지를 살피고,

내 의견을 전달한 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다시 묻는다.


“계속 치료를 이어 가시겠어요?
아니면 주치의를 만나 상의해 보시겠어요?
혹은 다른 치료 방식이나 장소를 찾고 싶으신가요?”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일은,
가장 정중한 존중이며 배려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존중과 배려를 통해
나 자신도 더 잘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 환자 모두의 삶을

함께 존중하고 배려해 나갈 수 있다면,

언젠가 나도 ‘백세의사’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을까.


정중한 거절과 선택권은,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환자 모두를 지키는 선긋기'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