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벤지

이름도, 취향도 확실합니다

by 실버버드

‘벤지’는 1974년 개봉한 미국 가족영화다.

그 영화 속 개의 이름이 바로 벤지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작고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개, 벤지가

주인 없이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다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구해내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아주 영리하고 용감한 개의 스토리였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고,

나에게도 ‘개’ 하면 떠오르는 첫 이름이 바로 ‘벤지’였다.


내가 왜 영화 속 다른 집 개이름을 먼저 시작했냐 하면,

사실 우리 집 이 녀석에게는 원래 불리던 한글 이름이 있었다.
묘하게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 이름을 자꾸 부르다 보면,
괜히 더 살을 찌우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게다가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한글 이름은

미국 사람들에게 발음이 쉽지 않아 난감했다.

녀석에게도 영어식 이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직접 고르게 하면 어떨까?


나는 종이에 몇몇 이름을 하나씩 따로 적었다.

그리고 그 종이 카드를 한 장씩 녀석에게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제 네 영어 이름을 정할 거야.
이름을 들어보고 네가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그 이름으로 불러줄게.”

종이마다 쓰인 이름을 몇 번씩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그리고 공정한 심사를 돕기 위해

이름이 쓰인 면이 보이지 않도록

카드들을 바닥에 뒤집어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말했다.

“자, 이제 선택할래?”


멀찍이 떨어져 녀석을 지켜보았다.

녀석은 잠시 생각하듯 카드들을 바라보더니,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앞발로 툭 가리켰다.


이름선택.jpg


두근두근.

나는 얼른 다가와 종이를 뒤집었다.


벤지


앗싸~ 내가 어릴 적 좋아하던 개이름.

순간,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어느 날 갑자기 내게로 온 이 작은 녀석에게
그 이름이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벤지는 종이를 가리킨 뒤에도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 골랐지?"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오늘부터 네 이름은 벤지야.”


그날 이후, 벤지는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름'이라는 건 그렇게,

서로를 부르는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은 약속 하나로 좀 더 가까워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벤지는 그 영화 속 벤지와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벤지라 불리면서 영화 속 '벤지'처럼,

다정하고, 똑똑하고, 용감한 개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벤지가 나를 열받게 하는 일이 있거나

급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줄여 부른다.

"벤!"


녀석은 지금까지 벌써

내 책을 다섯 권째 잘근잘근 해 먹었다.

주로 의학책.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비싼 하드커버만 골라서 말이다.

'비싼 개는 비싼 책만 좋아한다'는 말,

개사전 어디에도 없었는데.

'영리한 개' 이름을 고르더니

학구열이 생긴 건지..

벤지는 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현재 우리 집 책장에는

마치 경찰이 옐로 테이프로 사건 현장을 막는 것처럼

칸칸마다 '개조심' 테이프가 둘러져 있다.


나는 가끔 외출할 때 벤지를 째려보며 말한다.

"벤! 내 책 해 먹지 마!"

녀석은 눈빛으로 받아친다.

"빨리 다녀와. 안 그러면

이번엔 미술사 책을 공부할 예정이야."


벤지가 다음 희생양으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건,

반고흐, 고갱, 세잔느의 고귀한 작품들이

컬러풀하게 버무려진

먹음직스러운 하드커버 미술사 양장본.


요즘 우리 집의 비싸고 두꺼운 책들은

진땀을 흘리며,

책장 꼭대기로 허둥지둥 대피 중이다.

책을 보기만 하면 좋을 텐데,

꼭 맛까지 봐야 하나?

고시 공부하면서 다 읽은 페이지를

한 장씩 뜯어먹은 사람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그렇다.

요즘 벤지의 새로운 취미는

개껌 대신 책이다.

개가 무슨 시험에라도 패스하려는 건지,

언젠가 신문에도 나려나..


벤지 신문2.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