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움과 촌스러움의 공존
그 시절 고등학생의 일과는 다들 비슷했다. 비슷한 지역에 사는 친구들끼리 돈을 십시일반 모아 봉고차를 대절해서 등하교를 했다. 매일 엄마께서 싸주시는 도시락을 두개씩 들고 학교 교문을 들어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덜그럭거리는 빈 도시락 가방을 흔들며 그길을 다시 내려와 봉고차를 탈때는 9시가 넘었다. 도시락 말이다. 멀쩡하게 들고가면 왜 저녁때쯤에는 반찬들이 이러저리 엉켜 하나가 되어 있는지, 반찬의 쉰내는 그렇게 온 교실을 채웠다.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파서 매점에서 뭘 사들고와 풀어놓고 먹기 일쑤였다. 모든 먹거리들을 향한 풍부한 식욕과 공부에 최적화된 무거운 엉덩이의 힘 덕분에 살이 쪄갔고, 3년 내내 입으라 맞춰 주신 교복은 3학년이 되면서 터질듯한 나의 몸을 겨우 견디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훨씬 먼저 보낸 어른들 이야기속에 ‘ 그때가 좋은거야.. 너희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이 이해가지도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하지만, 나름 고되었고 심각했으며 벗어나고도 싶었다.
‘난 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어.’
누군가 물어보면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두각은 나타내 보인적은 없지만, 늘 우등상보다도 글짓기 상이 많았던 어릴적 사실에 대한 믿음내지는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부모님은 공부도 잘하고 별 말썽 없는 딸보다는, 성악을 하고 싶어하는 한살 많은 오빠에게 온 관심을 반짝이셨고, 부모님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나에 비해 사춘기를 오래 심하게 겪은 오빠를 바라보며 철이 없는 동생쯤으로 생각하기로 맘먹었다. 이제야 내가 남매를 키우는 입장에서 보니 이해가는 부분도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씩은 섭섭한 마음을 지울수 없다. 재수를 하는 오빠 덕분에 별 관심을 받지 못한채 우리는 함께 대입을 치뤘고, 서울로 대학을 정한 오빠를 위해, 당연한듯이 나는 우리집의 경제사정에 맞는 대학을 지원했고, 내 점수에 맞는 불문과에 지원을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시작 되었다.
다양한 친구들도 만나고,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충실했다.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들어온 대학은 아니었지만, 이런 나에게도 고등학교때와는 다른세계들이 열리고 있었다. 학비를 올리겠다는 대학입장에 반대해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데모하는 선배들 동기들을 바라보면서 선뜻 참석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며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우리말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농활이라는 것도 가 보았고, 함께 힘을 합쳐서 행사가 진행되고 학생회가 꾸려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뿌듯해 하기도 했다. 저널리즘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면서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왜곡된 정치 프레임을 배우기도 했다. 다른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였다. 점점 마음이 커지고 머리가 열리면서 어른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른학교에 입학한 ‘그 아이’ 를 다시 만난 것은 여름방학때였다. 교회 여름 성경학교 보조교사로 봉사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위한 만들기 준비를 위해 회의실에서 만났다. ‘그 아이’도 나만큼이나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길어서 얌전히 넘긴 머리와 제법 대학생같은 옷차림이며,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말투와 행동들이 그러했다. 필요한것들을 가위로 오려가면서 만들고 붙이고 벽에 걸면서, 보지 못하고 지낸 몇개월 동안 대학생활이란 것을 해 보면서 서로 얼마나 생각이 달라졌고 깊어졌는지를 느낄수 있었다. 수년동안 알고지내며 했던 이야기보다 훨씬 많고 깊은 대화였다. 어색함도 그리고 막힘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긴시간 이야기했다.
여름성경학교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성공적이었다. 아이들도 즐겁고, 교사와 보조교사들에게도 보람찬 여름을 열어주었다. 교회가 작아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청년부였던터라, 며칠뒤 있을 처음 가는 청년부 수련회 겸 뒷풀이가 기다려졌다. 그 전날 설레서 못잔 밀린 잠이 기차를 타고서야 쏟아져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배멀미가 말도 못하게 심하지만 꾹 참아 보기로 하고, 목포에서 제부도까지 두어시간을 더 배를 타고 들어갔다. 장을 간단히 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등판에 살갖이 다 벗겨져도 모를 정도로 바다에서 물장난을 치고, 쉬고싶을 때는 구멍가게 지붕이 만들어주는 그늘을 찾아 가만히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저녁에는 서로 그 나이즘에 할만한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은 젊음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기에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든게 처음이기에 능숙하지 못했다. 화장, 옷차림, 심지어 운전솜씨까지도 촌스럽다. 그때 사진을 꺼내보면, 싱그러움에 대한 그리움과 촌스러움에 대한 아쉬움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그 뜨겁던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줄게 있어.. 생일이라면서"
‘그 아이’ 가 무얼 나에게 내민다. 장마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뜨거운 여름이 시작될때가 내 생일이다. 그렇다. 엄마는 나를 낳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7개월 만에 나를 쏟았고, 건강하지 못한 채로 태어나 한달 반동안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하는 딸 덕분에, 결혼 몇년만에 집을 장만하려 모아놓았던 돈을 모조리 잃었다. 1.8kg 로 쥐새끼만하게 태어난 딸래미 잘 돌봐 달라고 아빠는 그렇게 부대에서 미제 스타킹과 쵸콜렛을 간호사들에게 사다 날랐다. ‘오늘밤이 고비’라는 말을 몇번이나 넘기고 나서야 담당의는, 다행히 살아서 퇴원하지만, 장애가 있을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돐때까지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가를 아빠와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20 살이 넘어서도 생일이 되면, 많이 힘들었지만 얼마나 감사한 시간이었는지를 서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약했던 딸이 결혼을 해서 생후 두달 된 아들을 안고 들어오는 것을 인천공항에서 보신 친정아빠는 눈물을 그렇게 흘렸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서 온 딸을 보고 여러가지 생각이 마구 스쳤으리라.
집에 와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그 아이’ 가 준 물건을 풀어보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Tape 와 두세장에 걸친 편지였다. 이상했다. 교회에서 며칠전에 만났는데, 불필요하게 근황을 묻는 문장들이며, 자기 고민에서부터 다짐까지 굳이 왜 이런말을 장황하게 편지로 썼을까? 정갈한 향이 나는 개킨 옷을 들고 선채로 편지를 보시며, 엄마는 웃는다.
‘어머~ 얘가 너 좋아하나부다’
‘아니예요, 좋아한다는 말이 없는데 무슨요’
‘좋아하면 원래 변죽만 울린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