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분열 주의
나는 가끔 세탁기 속을 들어가고 싶다. 이불 빨래가 가능한 대형 통돌이 세탁기에 한 발을 넣고 다음 발을 넣고 켜켜이 접은 빨랫감처럼 몸을 접어 넣은 다음 삶음 코스를 누른다, 감정과 느낌과 생각들이 깨끗이 빨려나가고 얄팍하게 쥐어짜진 상쾌한 몸을 꺼내 널어 말리고 나면 숨 쉬는 게 조금 쉬워질 것 같다.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은 나이만큼 편찮으시고 아이는 나이만큼 자라느라 바쁘고 배우자는 나이만큼 직장 일에 치여 있고 나 또한 나이에 걸맞게 자궁, 관절, 시력, 내분비계의 여러 가벼운 병증을 안고 집안일과 부업과 돌봄 노동에 갈려 있을 뿐이다. 이웃집 엄마는 마흔다섯에 셋째 아기를 낳았다. 아이 하나도 제대로 길러내는 게 벅찼던지라 축하보다도 걱정과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리고 질투도.
내 몸을 쓸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과.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이 최소 10년은 더 해질 것이고 그 여자는 쉰다섯이 되리라. 쉰다섯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다. 직장도 직업도 배움도. 인생은 60부터 라지만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란 소리고 현실은 갓 성인이 된 아이와 엄마를 같은 스타트라인에 세우는 일이다. 젊고 똑똑하고 순진해서 다루기도 쉬운 어린애들을 뽑아가고 나면 남은 자리는 식장일과 청소일 운이 좋으면 성희롱하는 늙은이들이 오가는 말끔한 찻집 정도다.
임신을 하자, 세상은 그제야 나의 쓸모를 발견한 것처럼 굴었다. 내가 피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내 자리를 잡고자 버둥거림에는 무심하거나 아주 간단히 지워졌는데, 임신만으로 세상의 모든 관심과 간섭이 쏟아졌다.
태교에는 클래식이 좋고, 태아 때부터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라는 둥 얼토당토않은 것부터 시작해서 먹는 물, 음식, 운동, 보는 것, 가는 곳, 모든 것이 임산부를 위한 다는 핑계로 통제되었다.
임신한 년이 창피한 줄 모르고 배를 내놓고 다닌다고 삿대질하는 할배들과 이해할 수 없는 시샘과 노여움으로 노려보는 할매들 사이에서 말없이 노약자 석을 내주는 노인들에게 감사하며 함께 꾸역꾸역 앉으려니 가시방석이었다.
최대한 앉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눈앞이 캄캄해져서 내릴 역이 아닌 곳에 내려 의자에 누워 있다가 역무원이 상태를 보러 온 적도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고도 한참을, 지하철 세 대를 오는지도 모르고 보냈다. 출근 후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아이가 뱃속에 들었다는 것을 알리자, 축하한다고 말하는 직장 상사의 얼굴은 그늘이 져 있었다. 우리는 복직에 대해서 의논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 졸업 후부터 6여 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간신이 얻은 정규직장을 1년 만에 잃었다. 알량한 임신 보조금과 육아 지원금은 아이의 건강과 육아를 위해서였지 나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은 통제 불가능해졌으며 나의 사용 목적이나 존재 발전과는 무관하게 아이의 그릇으로만 온전해야 했다. 원래 마시지도 않지만 술 담배는 물론 가벼운 감기약이나 진통제도 먹을 수 없고, 넘어져서 가볍게 골절된 상처에 물리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칼날 위를 걷는 것 같던 몸매 관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가족과 사회가 뚱뚱한 사람, 특히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초등학교 때부터 뚱땡이 돼지년 소리를 들으며 몸소 겪어본지라 아무리 적게 먹어도 매일 불어 가는 체중계 위에서 비명을 숨처럼 들이켜야만 했다. 간신이 인간 선으로 기어 올라왔는데 다시 인간 이하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째서 민담 속의 미물들은 굳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을까. 인간 별로 좋은 것도 없는데. 무심결에 생각했던 것은 잠시 과거를 잊은 오만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 이전에 여자였고, 여자는 아무리 뛰어나도 남자랑 같은 인간이 될 수 없을 때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민담의 주인공인, 남자만이 가능한 유교선비와 동격으로 인간이 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때론 뛰어넘는 도술을 가진 여우와 구렁이도 결국엔 선비의 구원, 간택이나 혼인이나 동침을 해서 존재의 침입과 침해와 능력을 버려야만 온전해질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여자라는 꼬리표는 남성들이 특혜를 누린다고 물어뜯을 때만 간신히 뜯겨나갔다.
몸은 매일매일 조금씩, 그러나 한 인간의 평생에 감당해야 할 만큼의 변화를 단 10개월에 해치우고 또다시 3개월 안에 임신 전의 몸과 똑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임신 가이드에 쓰여 있었다. 정형외과 의사들이 티비에 나와서 떠드는 건강프로에서 체중증가에 대한 관절의 과부하, 특히 기간이 짧을수록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는 내용에서 임신한 여성의 체증증가 위험은 언급되지 않았다.
점점 불어나는 몸무게 때문에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도대체 어디까지 부풀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한 배 때문에 누울 수도 엎드릴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아기가 점점 커지면서 모든 내장을 밀어내며 폐와 위를 압박해 먹기는커녕 숨을 쉬기도 벅찼다. 가슴은 배구공처럼 딱딱하게 부풀어서 앞으로 튀어나온 돌덩이 세계를 감당하는 척추와 어깨가 매 순간 뒤틀렸다.
임신 육아 중 아기를 질투하는 남편의 식욕과 성욕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육아 서적에 당당히 쓰여 있었다. 어디에도 내가 부딪칠 육체적 변화에 대한 정서적 충격과, 배가 터질 듯한데도 부당하게 올라오는 굶주림과 허기, 타자에게 빼앗긴 육체에 대한 상실감과 외로움에 대한 것은 없었다.
모든 임신과 출산에 관한 구체적인 과정과 부위와 증상은 철저히 비밀스럽고 다양한 용어로 달리 불리며 임신당사자조차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임신 전 출혈이 왜 ‘이슬이 비친다’로 불리는지, 얇은 막처럼 그려지던 태반이 아기의 무게와 맞먹는 커다란 살코기 조직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사람이 죽는 통증의 수치는 8이라고 했다. 산통은 7이며, 이것도 긴 시간 계속되면 몸이 죽어버리기 때문에 간헐적 진통으로 숨 쉴 틈을 주면서 15분부터 3분까지 짧아진다. 고통은 15분에 한번 1분씩 아픈 것이 아니고 천천히 강해지다가 정점을 찍고 천천히 다시 떨어져서 통증 없이 쉴 수 있는 찰나는 1분도 되지 않았다.
자궁부터 시작된 진통은 골반과 척추를 타고 팔다리 발톱 끝, 손가락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내 몸뚱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존재하는지 남김없이 자각시켰다. 나는 내 모든 뼈와 장기와 근육, 손가락 마디와 그 안의 인대까지 고통의 엑스레이로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 고통이 물러가면, 나는 죽지만 않게 해 줄 다음 진통을 기다리며 지금 왜 나를 죽여주지 않는지, 아기를 낳아주면 죽게 해 줄 것인지, 정말 너무너무너무 궁금했다.
15분 단위로 시작한 진통이 9시간에 걸쳐 서서히 1분 이하로 짧아지면 분만 준비를 시작한다. 나는 초산인데 운이 좋은 편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산통을 36 시간 겪는 산모도 있다고 했다. 진통을 시작한 지 24시간을 넘겼는데 출산 기미가 없는 옆 침대의 산모는 밥을 먹으러 갔다.
나는 출산 시작부터 물 한 모금도 먹을 수 없었다. 엄청나게 힘을 쓰는 일을 시키면서 물 한 모금도 주지 않다니 옛 노예들에게나 할 법한 잔혹한 처사였다. 병원에서는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산모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하나도 없이 병원 중심적인 규정이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을 정도로 난방을 해대는 출산실의 가습기는 먼지가 뽀옛다. 말라죽으라고 돌 위에 엎어놓은 개구리가 된 것처럼 온몸의 숨구멍조차 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울었다. 눈물이 입술을 적셔서 살 거 같았다.
눈물이, 몸 안에 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이 몸이 물과 피와 체액으로 가득 찬 아직은 죽지 않은 고깃덩어리라는 것이 낱낱이 체감되었다.
나에게도 자연분만이 아닌 수술이라는 선택지는 있었다. 하지만 입원비를 포함한 출산 비용이 4배였다. 가제나 직장도 잘려서 수입이 줄었는데 아기와 함께 버티려면 한 푼이라도 더 아껴놔야 했다. 나는 자연 분만할 힘을 기르려고 출산 직전까지 매일 4시간씩 걸어 다녔다. 무통주사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지만 막상 출산에 들어가자 놔주겠다고 말하는 의사가 없었다. 때가 되면 놔줄 거라고, 누군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무통 주사도, 도움도 없었다. 출산은 누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몸이 해내거나 부서지거나. 해내고 부서지거나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뱃속의 아기를 밀어내려고 배 위에 올라탄 간호사가 갈비뼈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몸통을 눌러대고 아주 예리한 칼날이 마취 없이 생살을 갈랐다. 서걱하는 소리는 귀가 아니라 온몸이 들었다. 그 모든 고통을 그저 이 과정이 끝나간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을 걸고 견뎠다.
9시간의 산통을 겪고 아기를 낳은 후에, 안심할 틈도 없이 태반을 낳았다.
태반이, 내 몸이 낳은 빨갛다 못해 시푸르 딩딩한 살코기가 얼마나 싱싱한지, 정육점에 걸린 살덩이와 얼마나 똑같은지, 얼마나 탐욕스럽게 잡식 동물의 입맛을 돌게 하는지, 당장 국을 끓여 먹지 않으면 아까울 거 같았다. 나는 내 안이 얼마나 짐승과 닮았는지, 외부로 드러난 장기 없이 사는 남자들이 얼마나 신과 닮았는지, 잉태하지 않고 침범당하지 않는, 피 흘린 적 없는 완벽한 몸들에 질투심이 일었다. 다쳐서 상처가 시뻘겋게 입 벌리지 않는다면 피 흘릴 일이 없는 자들이 그들 안에 내장과 살코기와 짐승과 야만과 삶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른 않은 채로 신나게 생사놀이를 하는 것을 증오했다.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고, 태반을 낳고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뭐가 더 없어질 수 있으랴 싶었다. 하지만 육아는 내가 없어진 자리에 남은 골수와 뼈와 하얀 혈액과 관절과 인대를 더 파먹고 파먹고 파먹었다. 가족들은 그들의 싱싱한 유전자 일부를 내 몸에서 뽑아낸 걸 축하하며 당당히 나를 껍데기라고 불렀다.
뱃속의 아이는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산달이 차서 어서 분리가 되고 내 몸이 내 것이 되기만, 온전히 나 혼자이기만을 바랬다.
뱃속의 아이는 괴물이었고 배 밖을 나온 아기는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그것은 단 한순간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물 한 모금, 화장실 한번 갈 틈도 없이 들볶았다. 똥을 누는 건 운이 좋은 거고 몸을 씻을 수 있다면 사치였다. 몸에선 항상 상한 젖비린내, 토한 냄새, 땀 냄새, 계속 상처가 벌어지는 음부에서 나는 생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아기와 집안에 갇혀 미쳐버릴 거 같아서 아기를 데리고 나가면 안아줘야지 유모차에 태웠네, 유모차 색깔이 빨갛네, 아기를 씻겼네 안 씻겼네 아토피가 있네 양말이 있네, 없네, 날이 더우네 추우네 아기 옷이 얇네 두껍네 아이가 더럽네 토했네 오줌 쌌네 똥 쌓네 우네 자네까지 아주 다양한 모르는 사람들이 이 모든 말을 나에게 하고 갔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는 가족이 간섭을 해대고, 아기를 낳자 온 세상이 간섭을 해댔다.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내 정신은 붕괴되었다. 확실히. 그때.
그런데 막상 임신 기능이 곧 사라진다니 얼른 더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몸을 자본화하는 사회에 뼛속까지 물든 나는 내 몸까지 사회재원으로 느껴지고, 다른 여자와의 출산 경쟁에 뒤쳐진다는 불안을 느꼈다. 이미 사회적으로 뒤처지고 낙오되어 남편의 뼛골 빠지게 벌어오는 돈을 등쳐먹고사는 맘충이 되었는데.
아무리 재 취업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찾아도 아기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었고, 아기를 돌보느라 약해진 몸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더 적었다. 내가 육아로 속절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더 젊고 똑똑하고 부리기 쉬운 젊은이들은 사회에 끊임없이 공급되었다.
내가 좀 더 똑똑하고 잘 배우고 전문직이었다면 훨씬 직장을 지키기 쉬웠으리라. 애초에 임신으로 잘릴 일도 없었으리라, 양가에서 조금이라도 육아를 덜어주었다면 아픈 몸도 치료하고 일자리도 알아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가 내 밥벌이를 해낼 수 있었다면, 아무 남자나 치워주면 고마운 똥차처럼 결혼에 떠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도 기회도 없었고 행운도 주어지지 않았다. 딱 한번, 기회가 있었다. 정직원이 되었을 때 이혼하고 아기를 지웠어야 했다.
왜 그걸 할 수 있다는 걸 해치울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귀한 내 아들에게 김치통을 들려 보낼 수 없으니 네가 와서 김치통을 들고 가라는 시모에게 ‘제가 10킬로가 넘는 아기를 7킬로짜리 유모차에 태워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하철을 타고 어머님께 가서 저는 먹지도 않는, 어머님이 아드님께 주고 싶으신 김치통을 들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모진 소리를 해 노여움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사려 깊은 반려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까 봐 내가 육아로 얼마나 몸이 망가진 상태인지 시가에 알리지 않았고 기실 그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몰랐다. 디스크 3개 파열로 허리와 다리가 마비될 때까지.
국가는 아기를 원하지만 사회는 아기를 성가셔했다. 아기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없고 배가 고파도 밥집에 앉을 수 없고, 아기와 유모차를 동시에 들어 올리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것은 용감하기까지 한 도전이 되었다.
허리가 부서져서 공원에 나가는 것도 큰일인 날들이 늘어났다. 나의 세상은 점점 좁아져 열 걸음 집안이 되었다. 아기가 조금 자라, 공원에 가자고 보챌 때에 나는 오직 아이를 위해서 팔순 노인처럼 굽은 허리를 유모차에 의지해 아기를 데리고 공원에 갔다.
유모차에 의지 하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고,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게 된 후에도 나는 집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외출은 오롯이 아기가 어린이집을 오가는 때 단 두 번, 그 시간에 장보기까지 마쳐내야만 했다.
때론 아이를 데리러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날들도 많았다. 나는 출근하는 것도 아니면서, 아기 이유식을 엄마가 직접 하지 않고 사 먹이는 나쁜 엄마였다. 아무도 내가 뭘 먹었는지, 얼마나 아픈지, 자기는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건너 집에 사는 몸이 약한 아이를 열심히 돌보던 엄마는 유방암에 걸렸다. 그 앞 집 엄마는 쉰에 낳은 둘째 아이가 성장장애 판정으로 벌써부터 병원신세였다. 랜선 건너 친구의 아이는 성조숙증이고 전화너머 친구 아이는 틱 장애로 고생 중이다. 건강한 엄마는, 건강한 아이는 유니콘처럼 희귀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존재는 그보다 더 희귀했다. 놀이터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독박육아 클럽이 되어버렸다.
나를 기른 적도 없는 시부모는 나에게 아들을 준 값으로 생활비를 요구했다. 남편의 통장을 관리했던 시모가 결혼 후 석 달 동안 월급통장을 내주지 않으려고 해서 받아다 달라고 요구하고 요청하고 애걸하고 화를 내고 싸우며 간신히 월급 통장을 넘겨받았다. 남편은 먹고 꺼지라는 태도로 월급 통장을 내 얼굴에 집어던졌다. 내 벌이가 없어서 그 돈을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은 치욕스러웠다.
나는 오래 누워 있었다. 사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누울 수도 설 수도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지만, 누울 수 있다면 그래서 잠들 수만 있다면 기침만 해도 온몸이 부서질 거 같은 통증에서 잠시, 놓여 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있노라면 하고 싶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과 보고 싶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때려죽이고 싶지만 쌩쌩히 잘 사는 얼굴들이 빚쟁이들처럼 몰려와 아우성쳤다.
집착이고 미련이고 다 지난 일인 걸 아주 잘 알면서도 생각이 거기서 맴도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전에는 나쁜 일이 있으면 먹거나 자면 지울 수 있었다. 아기를 낳은 후로 잘 수 없게 되었고, 극심한 체중조절 후유증이 식이 장애로 남아 먹는 족족 토했다. 나는 남들이 없을 때만 몰래 한입 먹었다. 누가 내가 먹는 것을 알아챘다면 전부 토했다.
잠들 수 없었으므로 내일은 오지 않았다.
나의 지옥은 언제나 오늘로, 영원했다.
누구나 비혼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꿈을 이루고 취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전부 실패했다. 시가와의 서먹하고 어려운 식사는 상사와의 회식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남편이 직장일 외엔 기본 생활을 이루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내의 보필을 기본으로 하는 수당과 세재혜택이 포함된 월급을 받아오면서 퇴근하면 피곤하니까 입 닥치고 귀찮게 굴지 말라고 혼자 돈 버는 생색을 낼 때, 나를 기른 적 없는 사람들이 제 아들 기른 값을 함께 갚으라고 정기적 입금을 요구할 때는 참기 어려웠다.
딸이지만 자식이니까 자기들 창피하지 않게 대학은 졸업시켜 얼른 취집으로 해치워버린 친가는 나에게 왜 자꾸 아무 데나 나가서 푼돈 벌이를 하느냐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걸로 대충 먹고살고 힘든 건 하지 말라고 하면서, 대충 아무 데나 나가서 번 돈으로 쥐어주는 용돈을 받으면 좋아서 아들 필요 없고 딸이 최고라고 했다.
돈을 안 주면 씨발년이라고 불렀다. 남동생은 돈을 주어도 안 주어도 잘 살아도 못살아도 너무나 자랑스럽고 안쓰러운 존재였다. 아마 남편도 그랬으리라, 그런 존재들, 살아 있는 신들을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다.
시모도 남편 벌이로 먹고살아라. 하셨다. 당신은 평생 고생했지만 아들은 잘 났으니 너는 편히 살으라는 고마운 말로 들었지만 내 아들과 나란히 서거나 앞설 생각은 하지 말라는 가시가 있었다. 나는 몸이 부서져도 벌었다. 내 몫을 해내려고 했다. 나는 똑똑하지도 유능하지 않지만, 누구의 삶도 편안하지 않으며 특히 노예의 삶은 편안할 수가 없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혼해서 처음 시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간 자리에서 다들 나에게 밥값을 하냐고 물었다. 남편을 뜯어먹는 무능한 식충이가 아니라 내 먹을 벌이 정도는 한다고 대답했더니 그게 아니고 ‘아기 가졌느냐.’는 뜻이었다. 도대체 혼전 순결을 지켜가며 결혼한 새댁에 한 달 만에 임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학생일 때 연애하면 비행 청소년이 되고, 처녀일 땐 결혼 안/못 한다고 난리 치면서도 행여나 남자 친구가 생기면 제대로 거래할 기회도 없이 사랑만으로 결혼해 버릴 까봐 전전긍긍하고, 임신이 장려되지만 임신 후 혼인은 여전히 도외시되며 낙태는 금지된 돌아버릴 세상에서 용감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임신을 못하는데 그게 남편 탓이면 어땠을까? 궁금했다. 며느리가 쎄서. 라는 말이 떠올라 미소 지었고 시어른들은 새색시가 예쁘게 웃는다면 칭찬하면서도 웃으면 딸을 낳는다고 불안해했다.
36시간 뼈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방금 아이를 낳고 태반도 낳느라 기진해서 둘째는 아들이면 딱 좋겠다고 무심히 말한 이가 시부였는지 시모였는지 친모였는지 친부였는지 산부인과에 사는 어떤 망령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먹고 싸고 울고 떼쓰며 몰아쳐대는 아기의 요구에, 모든 순간에 부재하는 남편에, 어느 때 건 충실히 함께 하는 척추와 골반의 통증과 조금이라도 분리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느끼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살아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나의 본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혼 전에 친부가 따로 불러서 잘 데리고 살라고 한마디 한 것을 원한처럼 여기며 명절이나 결혼식등 가족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날은 입을 꽉 다물고 조용히 화를 내고 있었다. 시모가 몇 번이나 따로 나를 불러 당부한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
본가 친척들은 우리에게 함부로 인사를 건네러 오지 못했다. 친가 가족들과 남편 사이에 끼어서 몇 번 진땀을 빼고 나자 나는 나를 위해서 남편의 동반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나의 본가를 혼자 찾아가지 못했다.
나는 드라마틱하게 불행하지 않다. 나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한 발 한 발 세탁기에 몸을 넣고 웅크려 앉는다. 손을 뻗어 삶음 코스를 누르고 뚜껑을 닫는다. 깨끗하게 삶아 빨아지고 나면 나는 다른 아내 다른 엄마 다른 여자로 그들이 원하는 적당한 누군가가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