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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여자

시모주의

by 은림




엄마는 지하철 옷가게 앞에 한참을 서성였어. 봄처럼 예쁜 하늘색 자켓과 꽃처럼 예쁜 분홍색 자켓 위로 손이 닿을락 말락 몸에 대불까 말까 하다가 두둑이 쌓인 뱃살이 눈에 들어왔어. 언제 이렇게 살이 쪘을까. 눈코 뜰 새 없는 집안일에 가족 뒷바라지를 하고 양가 부모님을 챙기느라 몸이 어떻게 변하는 지, 애초에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엄마는 유리문에 비친 몸을 낯설게 바라보았어.


“입어보세요~”


가게 주인이 말을 걸자 엄마는 화들짝 한발 물러서.


“에이 안 맞을 거 같아요.”


옷가게에서 돌아선 엄마는 서둘러 통로와 모퉁이마다 즐비한 예쁜 악세서리와 신발과 가방과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디저트와 튀김 매대 앞을 지나가. 오늘 저녁은 굶고 뱃살을 좀 빼야지. 엄마는 어제도 그 생각을 했던 거 같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하겠지.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식구들이 남긴 잔반을 보노라면 다시 반찬통에 넣을 수도 없고 버리기도 아까워서 그냥 남은 밥한 술에 비벼 입에 밀어 넣어.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으로 살뜰히 장을 봐서 바지런히 꾸린 소중한 음식인걸.


남편의 벌이와 엄마의 부업으로 아이들 키우고 부모님께 보태고 하면 늘 빠듯한 살림살이라 뭐 하나도 낭비없이 아껴쓰고 모아쓰고 버리지 말아야 해.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는 아이들이 싫증난 옷과 신발을 대충 꿰어 입어.

남편이야 바깥일을 하니 무시당하지 말라고 번듯이 입혀서 내보내지만 엄마가 하는 일은 벌이도 적은 소소한 부업이고 집에서 누구 볼 사람도 없는데 잘 맞는 새 옷이나 신발은 필요하지 않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이젠 뭘 사기가 어색해.


바쁘던 엄마의 걸음이 잠시 할인 책 매대 앞에서 멈칫해. 책은 좋은 거잖아. 마음의 양식이고, 옷이나 신발보다도 싸고 여럿이 돌려 읽을 수도 있고 다 읽으면 헌책방에 팔수도 있고, 재밌는 책은 심심할 때마다 다시 펼쳐도 괜찮으니까 살까. 하다가 그 옆에 조리기구 할인 매장의 냄비를 사기로 해. 책은 나를 위한 거지만 음식은 가족들을 위한 거니까. 엄마의 지갑은 거기에서만 열려.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을 받을 때면 한층 좁아진 어깨와 늘어난 주름살이 보여서 뼈와 살 값을 받는 기분이 들어 목이 메.



언젠가부터 고맙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고맙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고맙고, 그 적은 돈으로 살뜰히 가족을 보필하고, 부족한 돈은 부업과 엄마의 노동력으로 때우다 보면 몸과 마음이 지쳐서 그 말이 잘 나오지가 않더라고. 그렇게 사는 게 알콩달콩이래. 바득바득 버텨도 힘든 그게.


어영부영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딸인 걸 알게 되자 임신의 기쁨 보다는 설움과 노여움을 느꼈던 건 엄마가 촌스러웠기 때문일거야. 그냥도 버티기 힘든 지독한 세상에서 불편한 여자로 살아야 하는 아이가 가엽고, 너무 소중해서 삶의 볼모가 될 자식이 약한 존재로 세상에 나오는 게 너무 싫었어.


하지만 첫 아이고, 아들을 선호하는 양가 부모에게 반항심이 들었어. 엄마 같은 여자아이를 낳는 게 싫은 기분보다, 아무도 반기지 않을 뱃속의 아이가 가엽기보다 지기 싫은 마음이 더 강했던 거 같아.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도 살라고. 한번 살아보라고, 그런 생각으로 딸을 낳았어.


둘째로 아들을 갖기까지 중절을 세 번 했고, 기어코 아들을 낳았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지. 뿌듯하고 든든했어. 이제 아들이 없어서 얼마나 서운하냐 둘째는 꼭 아들을 낳아야지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게 엄마는 제일 좋았어.


아들은 아들이라 참 특별하더라고. 남편이 하는 행동은 마음에 안 들어도 아들이 하는 건 마음에 쏙 들고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았어. 엄마가 낳은, 진짜 엄마만의 남자. 버젓한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서 늘 반편이 취급 받고, 결혼을 해도 아들의 며느리, 손주의 어미 일뿐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취급받지 못했는데 아들을 낳자 당당히 한 인격체로 인정하더라고. 하긴 봐봐 신들은 죄다 남자잖아. 남자만 신이 될 수 있는 거잖아. 성모 마리아도 신의 엄마니까 신이 된 거잖아.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는 거잖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외출할 때는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밀더라도 특별했어. 바람이 어찌나 부드럽고 담벼락에 핀 아무 꽃들도 화사하던지. 무엇보다도 공기, 아들과 다닐때는 딸과는 다른 신비로움이 있었어. 남편을 처음 만나서 서로 아무것도 몰라서 더 설레일 때의 그 기분 말이야. 아들이 꼭 그랬어.


딸들은 앙탈을 부려. 저는 얻어온 자전거를 태웠고 아들은 새 걸 사주었다고 시샘해. 같은 여자인데 제 엄마를 무시하고 존경할 줄을 몰라. 제 몸과 내 몸이 다를 바가 없으니 신비감도 없지. 우리는 너무 똑같아. 너무 똑같으면 질리는 법이야. 걔가 하는 걸 왜 그러는지 나는 전부 알겠어. 내가 하는 걸 그 애는 전부 알아. 그래서 우리는 아무 신비감도 거리도 격식도 없고 서로를 혐오해. 같은 극 자석처럼 서로 밀어내.


아들은 다르더라고. 아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남자인데 남편도 연인도 아닌데 내 것이라니 너무나 신비롭고 기특해. 아들은 딸보다 힘도 세고 거칠게 반항해, 뭐든 때리고 밀치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길들이려 들어 사납고 무자비한 신처럼. 바로 그거야. 아들은 엄마가 낳은 신이고, 엄마를 여신으로 만들어. 엄마는 아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섬기지. 영원한 건 아니야. 새로운 여종이 나타날 때까지만.


아들이 여자친구를 보여줄 때마다 엄마는 그 여자들이 예쁜지 똑똑한지 집안에 돈이 많은지 보다 우선 내 아들을 잘 섬길 것인지 면밀히 살펴. 너무 똑똑하면 안돼. 내 아들을 무시할 테니까. 집안은 적당히 부유해야해. 내 아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고 타넘지도 못하도록. 건강해야해. 내 아들의 짐을 나눠 질 수 있게. 그리고 내 아들한테 푹 빠져서 신처럼 받들어야해.

그런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엄마는 아들 엄마로서 위세를 누리며 어설픈 계집애들에게 퇴짜를 놔. 엄마는 대학을 못 나왔고 집안에서 일만 했지만 대학도 나오고 그 나이의 엄마보다도 예뻣을 계집애들이 엄마 앞에서 절절매. 그것도 제법 고소해.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결혼 시키면 엄마는 공물을 받아. 딸을 결혼 시킬 때는 엄마가 공물을 바쳐야 했어. 사위집에서 장만해온 대출이 80프로인 신혼집에 잔금을 보태주고 혼수품을 사 빈 집을 채워 넣고 예단비를 보내. 그럼 그 예단비의 절반이 친정식구들이 옷이나 결혼식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하도록 답례로 돌아와. 절반이 돌아오는 것도 고마운 거고 아예 안 보내는 무례한 경우 이야기도 들었던 터라 엄마는 감지덕지하고 예의바론 집안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

대출은 딸이 사위와 함께 벌어서 갚게 될거고, 보낸 돈의 절반을 다시 보내는 게 어떻게 답례가 되는지 결혼의 셈은 정말 이상하지만 세상이 그렇다 하니, 내 피붙이를 잘 봐 주십사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로 해. 그저 신의 분노를 피하려는 인간들처럼 내 딸에게 해가 가지 않기를 바라며 무엇이건 바치고 무엇이건 빌고 싶어.


엄마가 딸을 낳아 억울했던 건 아들에게 보상 받을거야. 엄마 대신 며느리가 아들을 섬기며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엄마의 공물까지 챙겨 줄 테니까. 아무렴. 그런거잖아.


엄마는 이 긴 생각을 그 하늘 색 옷 한 벌과 지하철을 타는 사이에서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행을 타야하는 지 잊어버려. 국철이던가? 1호선 이던가. 아이참 경의 중앙선은 대채 몇 호선이 바뀐거더라. 엄마는 망연히 아무것도 타지 못하고 사람들이 다 타고 간 자리에 덩그렇게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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