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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청계사

미로주의

by 은림


며칠째 작업물에 매달려있었다. 머릿속에서 굴러만 다니던 그것을 종이에 스케치하고, 모양을 다듬고, 풀과 테이프로 이어 붙여 시안을 만들어 보았다. 2D와 3D프로그램도 돌렸지만 종이와 컴퓨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모니터 속에 형태를 여러 버전으로 세분화하고 질감도 입혀보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것은 작업실의 먼지와 밤샘에 젖어 몽롱한 머리와 침침해 보이는 모니터 안에만 존재하는 유령일 뿐 도저히 내 힘으로 꺼내올 수가 없었다. 다이소에 파는 글루건이나 클레이로도 형태를 잡아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진짜. 를 원했다.





“을지로 3가에 가봐. 거기서부터 쭈~욱 물어봐.”


커피를 마시러 들른 선배가 내 너저분한 책상을 흘끗 보고 말했다


“을지로 어디요? 이걸 만들어 주는 데가 있어요?”


나는 다시 한번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네가 처음 만들 건데 어디서 그런 걸 만들겠어. 일단 가서, 물어보라고. 그 출력물이랑 종이 쪼가리들 챙겨가는 거 잊지 말고.”


나는 선배의 충고대로 주섬주섬 책상의 것들을 천가방에 쓸어 담고 을지로 3 가행 지하철을 탔다. 역을 벗어나자마자 역한 수지 냄새와 쇠를 써는 날카로운 소음과 알록달록한 조명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덩어리와 색채가 오감을 휘저었다. 어느 구석이던 어떤 제품 혹은 건축 혹은 예술품의 기초가 될 것들이 을지로 3가부터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구석까지 세포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처음 이유식을 맛본 어린애처럼 허겁지겁 그 모든 재료를 만져보고 쓰임새를 묻고 내가 만들고 싶었던 작업물과 조금이라도 재료가 닮았거나 쓰임새가 비슷한 제품들을 찾아다니며 견본을 모았다. 그러다가 구상한 것과 가장 닮은 자재를 가진 가게를 발견하고 용감하게 문을 열었다. 가게 이름은 을지사였다.


“안녕하세요. 저, 이런 걸 찾고 있는데요. 혹시 여기서 할 수 있나요?”


고시원 방 크기만 한 가게 안에는 오래되어 녹슬어가는 철제책상이 있었고 사방엔 천장까지 꽉 짜인 선반 때문에 벽이 안보였다. 선반마다 다양한 견본과 제품이 각각의 규칙성을 갖고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내겐 그저 뒤죽박죽 된 거로 보였다.


난로를 쬐고 있던 사장님은 두툼한 토시자락을 매만지며 내가 꺼내놓은 견본과 출력물과 장황한 설명을 듣다가 잠깐 기다리라며 제품으로 둥지를 튼 좁은 동굴 입구 같은 책상너머 사라졌다가 잠시 후 뭔가를 들고 나왔다.


“이런 건가요?”


양손에 들린 물건들은 크기와 모양은 달랐지만 질감과 용도가 내가 생각했던 부품과 아주 유사했다.


“네, 근데 저는 이 부분은 없고요, 여기를 이렇게 하고 싶어요.”


사장님은 출력물과 샘플과 본인이 꺼내온 제품을 앞치마에 닦으며 내가 구현하려는 작업물이 어떤 건지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럼, 이걸 가지고 요 위 길 건너 굴다리 옆 우체국 골목에, 청계사라고 있어요. 그리 한번 가봐요.”


나는 내가 만든 유령이 세상으로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에 마음이 들뜨면서도 한편 겁이 났다. 빤한 내 통장 잔고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걸 제품으로 하면 대충 얼마나 나올까요?”


기대와 걱정이 뒤엉킨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님은 제품 견본만 만지작댔다.


“자세한 옵션에 따라 다르지. 가서 물어보고 거기서 안 되면 다시 와 봐요.”


사장님은 청계사로 가는 자세한 약도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사장님이 가르쳐준 가게를 찾아가다가 중간중간 내가 생각한 작업물과 좀 더 닮은 재료들을 발견했고, 어디든 들어가 만드는 방법과 가격을 문의했다. 재미있는 건 어느 가게나 다 낡고 작고 허름했는데 제작품과 샘플이 잔뜩 쌓인 구석 어딘가에서 또 뭔가 새로운 것이 계속 나온다는 거였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주는 재료를 어린애처럼 넙죽넙죽 받아 배웠다. 그러다 보니 뭐가 가능한지 뭐가 불가능한지, 어떤 재료가 유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 어떤 재료가 더 비싸고 다른 건 왜 싼 지를 듣게 되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가게 안 밖에 서성이는 사람들은 점원이건 주인이건 지나가는 길이건 낯선 손님의 질문에 관심을 갖고 답해 주었고 취급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어디쯤에 가면 있을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건 상인과 손님의 대화라기 보단 함께 생각하고 답을 찾아보려는 동료 같은 태도였다.

나는 비슷한 제품의 다른 점을 알아내면서 더욱 정교한 차이와 만듦새를 상상할 수 있었고 생판 관련 없는 자재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청계사에 도착할 즈음 나는 이제 완전히 어떤 물건을 어떻게 만들면 좋겠다 비용은 얼마쯤 들겠다는 감이 섰다. 가격에 따른 재료와 만듦새에 타협도 어떻게 할지 여러 가지 방안도 생각해 놓았다.

청계사 사장님은 정말로 내가 원하는 비용과 형태에 아주 근접한 제품 견적서와 샘플을 제시해 주었다. 나는 거기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몇 가지 조건을 달았고 사장님은 그것에 기반해 조정 가능한 제작 단가표를 두 개 더 만들어 주었다. 나는 개인 창작품 1점 견적서와, 시제품 제작 후 대량 주문에 관한 견적과, 다른 부자재 사용에 따른 견적 변화와, 제작기간 스케줄이 두툼한 스프링 노트 위에 계산기와 낡은 모나미 볼펜 하나로 마법주문처럼 빼곡히 적혀 나가는 걸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경로를 고려한 제작데이터를 모을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어떤 게 좋겠어요?”


나는 종이 위에 쓰인 숫자와 옵션을 열심히 뜯어보았지만 당장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알게 된 것들을 반영해 더 뜯어고칠 것들이 생각이 났다.


“조금 고쳐야 할 거 같아요. 수정해서 다시 올게요.”


“그래요 그럼. 변경 사항에 따라 가격이랑 제작기간이 달라진다는 거 꼭 기억하고요”


사장님은 내가 활용 가능한 모든 옵션에 대한 충고와 견적이 쓰인 종이 한 장을 북 찢어 주었다. 나는 종이를 소중히 접어 넣고 다른 더 멋진 아이디어를 빌려올 것은 없을까 가게 내부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사장님은 한동안 기다리다가 내가 구경하도록 내버려 두고 책상너머로 사라졌다.


책상 위까지 빼곡히 들어찬 제품을 살펴보던 나는 의자 뒤에 좁은 문을 발견했다.


‘저기서 제품을 가지고 나오신 건가?’


을지사에도 저런 문이 있었다. 오는 길에 들렀던 다른 가게들도 좁은 안쪽에서 계속 뭔가를 꺼내왔었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 가게들 뒤에 대체 얼마나 큰 창고가 있는 걸까?


“사장님!”


나는 뭔가 더 있을지 궁금해서 그 문안에 머리를 비집어 넣었다. 갑자기 암흑이 나를 덮치며 몸이 쑤욱 좁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저히 내 두꺼운 외투와 커다란 가방이 통과할 수 없는 크기의 문이었다. 나는 어지러워져서 바닥을 짚고 잠시 앉았다. 천정과 벽이 구분가지 않는 침침한 어둠 속이었다. 어디든 산처럼 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뒤돌아보자 들어왔던 좁은 문이 환하게 보였다. 언제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사장님-!”


나는 부직포와 PP제품의 산과 접착제 테이프 롤의 아치를 넘고 합성수지와 에폭시가 흐르는 좁은 내를 따라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와 금속재료로 만들어진 장황한 건축들 너머에 어른대는 사장님의 그림자를 계속 따라갔다. 곳곳마다 걸린 알록달록하고 복잡한 조명들 때문에 길을 잃거나 다칠 위험은 전혀 없었다. 내가 들어온 것과 비슷해 보이는 쪽문들이 몇 발자국마다 있었다. 나는 거길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계속 갔다.


“사장님!”


사장님은 나를 돌아보곤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나는 간신히 숨에 턱에 닿아 사장님을 따라잡았다. 사장님은 긴 시냇물 앞에 앉았다. 나는 청계사에 가면서 만난 다른 사장님들 몇이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고 간식거리를 우물거리며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 따라왔네.”


사장님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컵에 시냇물을 떠서 커피믹스를 타주었다. 물은 아주 기분 좋게 따끈했다.


“그거 만들려는 거, 괜찮더라. 잘해봐요. 가격이 부담되면 최대한 맞춰 볼 테니까.”


사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호록 마셨다. 그동안에 시냇물이 점점 줄어들어드는 게 보였다. 시냇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님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깊어지고 두런두런 걱정하는 말들이 들렸다.


“사장님, 저 물은 뭐예요?”


사장님은 시냇물을 보고 내 얼굴을 보았다.


“글세, 학생 생각엔 저게 뭐 같아요?”


시냇물의 시작은 보이지 않았다. 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말라가는 것은 보였다.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학생이 저것의 이름을 알 때까지 저게 흐르고 있어야 할 텐데.”


사장님은 잠시 여길 지켜야 한다고 먼저 나가라고 길을 가르쳐 주었다. 돌아 나오는 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길을 잃으면 중간중간에 보인 아무 쪽문으로나 나가도 될 거 같았다. 그 쪽문들은 을지로와 청계천의 모든 상가들마다 하나씩 있었고 모든 문들이 이곳과 이어져 있을게 분명했다.


나는 들어왔던 쪽문으로 얼굴을 디밀기 전에 잠깐 뒤돌아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고 산처럼 쌓인 제품들 외엔 아무것도 안 보였다. 물소리가 들렸다. 그 냇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나는 쪽문을 나와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고 가슴에 품은 쪽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에 거리로 나섰다.

분주히 오가는 작은 오토바이들이 가게에서 가게로 작은 공장에서 공장으로 필요한 재료를 나르고 가공을 마친 재료를 다음 가공처로 옮겨가고 있었다.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기가 어려운 장소였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채로 나가기는 더 어려운 장소였다.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을지로와 청계천의 장인 여러분과 공업사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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