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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兒>

책임감주의

by 은림

“나 임신했어.”


그 애가 입을 뗐다. 공기가 탁해서 숨이 막혔다. 대기 중에 꽉 찬 미세 먼지가 둥둥 떠다니며 그 애와 나 사이를 흐릿하게 멀어지게 했다. 마음속에서 씨발, 짜증이 치밀었다.


“어쩌라고. 그게 내 책임이야? 너도 좋아서 한 거였잖아. 너가 임신한다는 거 너 몰랐어? 당연히 너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있는 대로 퍼붓고 나자 생각이 들었다.


좋아서. 했을까? 처음엔 싫다고 했었다. 기집애가 빼긴. 들이댄 거 쪽 팔리게. 내가 투덜대자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위로하듯이. 그리고 그냥 했다. 피임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씨발. 하고 싶은데 콘돔을 사러 갈 정신은 어디 있으며, 언제 할지 모르는데 미리 사두는 것도 웃겼고, 씨발 쪽팔리게 콘돔을 사는 건 진짜 싫고, 비쌌다. 콘돔.


그 애는 처음엔 아파했다. 그다음엔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었나? 아무려면 어떤가. 그런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 번 했으니 두 번도 했고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을 때 계속했다. 애는 나를 사랑했고 내 거였다. 과정이야 어쨌든 나는 강간한 적은 없다.


“왜....”


촌극처럼 내 애야?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유치하고 나쁜 놈은 아니다. 하지만 억울했다. 왜 하필 나야? 똥 밟은 게. 그런 생각을 부지런히 굴리면서도 씨발 걱정이 됐다. 임신 중단비를 달라진 않겠지? 나는 돈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콘돔도 안 샀다. 그 애도 돈이 없다. 우리가 돈이 없다는 건 둘 다 너무 잘 알았다. 우리의 데이트는 천 원짜리 길거리 아이스커피고 좌석은 그늘도 없는 편의점 벤치였다. 점심은 4000원짜리 떡순튀 세트고 가끔 호기를 부려서 편의점 4캔 만원 맥주를 마셨다. 섹스는 피씨방 커플석에서 게임하다가 몰래 했다. 모텔비 같은 호사는 누린 적 없었다.


“좋아서 한 게 아니잖아.”


마침내 그 애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뭐라고?”


“임신, 내가 되라고 한 거도 아니고. 너랑 잔 거, 좋아서 한 거 아니라고.”


“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그 애가 나랑 한건 뭐란 말인가.


“네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서. 했어.”


씨발 멍청한 년.


“사랑받고 싶었어.”


꾹꾹 눌러 참아온 그 애의 한 마디가 옷소매로 무겁게 툭. 떨어졌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처럼 눈물도 빨간색이었다. 여자들은 원래 이렇게 피를 잘 흘리나? 생리할 때도 피 흘리고 섹스할 때도 피가 나고 울 때도, 피를 흘리나?


“씨발 내가 너랑 한 게 사랑이라고.”


나도 울고 싶었다. 그 애는 빨간 눈으로 빤히 나를 보다가 더 말없이 사라졌다. 뒷모습이 짙은 미세 먼지 속으로 흐릿하게 꺼져서 정말로 사라진 것 같았다. 같이 먹은 밥값을 혼자 다 내고 나오니 기분이 더러웠다. 씨발 임신 소식을 들은 게 김밥천국이라니.


‘사랑받고 싶었어.’


자꾸 그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란 건가? 도대체. 그 애가 말한 사랑이라는 게 뭔가? 같이 느끼한 케이크와 달아서 목이 메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물을 사느라 죽도록 아르바이트하는 거? 그런 걸 바란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못을 박았다. 그런 건 허영심 가득한 김치녀들이나 하는 연애고, 우리는 아주 특별하고 순수하고 서로에게 바라는 거 없는 사랑을 하는 거라고. 그 애가 손수 만든 음식이나 촌스럽고 따뜻한 목도리나 세일하는 브랜드 재킷이나 지갑은 정성스러워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편의점 폐기 시간을 넘긴 디저트나 사은품으로 오는 마스크 팩을 잘 챙겨두었다가 그 애 주머니에 쓱 찔러 넣곤 했다. 얼마나 환히 웃던지.


“씨발 사람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냐. 존나, 배려심도 없네. 씨발.”


나는 눈앞에 떠오른 얼굴을 지우려고 앞머리를 헝클였다. 그 애가 멋지다고 말한 이마선이 잠깐 흐트러지다 다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보지 않아도 멋지다는 게 느껴졌다.


“너는 나를 안 사랑한 거야.”


더러운 가래침처럼 그 말을 길바닥에 뱉었다. 갑자기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래, 너는 나를 사랑 안 했어. 나도 그렇고. 잘 가라. 쿨 하게 그 말을 바로 해주지 못한 게 미련스러웠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굽이굽이 골목 진 푸르스름한 길을 퇴근했는데 문 앞에 누런 택배 상자가 있었다. 어제 출근 전에는 보지 못했다. 이 새벽에도 배달이 오나? 뭐 산 게 있던가? 상자를 열자 안에는 꼬물대는 작은 복숭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보송하고 부드러운 몸뚱아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감히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삑삑 대는 연약한 소리는 어렸을 때 기른 작은 병아리 같았다.


<아기. 잘 길러.>


상자 한쪽에 굴러다니던 A4 종이에는 딱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아기? 이게 아기라고?

종이를 보고 다시 상자를 보았다. 졸려서 묵직한 머리를 누가 막 두들겨 패는 거 같았다.


그 애랑 내 아기? 그걸 낳았다고?


“아! 시끄러워!”


신발 한 짝 너비로 바싹 붙은 옆집 창에서 내지르는 소리에 나는 얼른 상자를 갖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과 부엌을 합해 한 평반짜리 방바닥에 상자를 놓고 보니 얼이 빠졌다. 안의 것들은 끝도 없이 삑삑 대고 끽끽 댔고, 곧 상자는 진득하게 배인 똥냄새 오줌냄새를 집안에 풍기기 시작했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다가 먹이고 안에 싼 오물을 치웠다.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쿵쿵 벽을 두드렸다. 상자 위에 이불을 덮었다. 삑삑 소리가 좀 줄어들었다. 그래도 시끄럽고 덮고 잘 이불도 없고 해서 잠을 설쳤다.




아침에 대충 씻고 남은 우유를 마시고 알바를 나갔다 돌아와 보니 복숭아 몇 마리가 흐느적댔다. 급히 폐기로 챙겨 온 우유를 뜯어 먹였다. 몇 마리는 나아졌고 몇 마리는 그대로였다. 나는 초조하게 흐느적대는 복숭아들을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아보고 억지로 우유를 입안에 흘려 넣었다. 병원에 가야 할까? 복숭아는 어디서 봐주지? 소아과? 동물병원? 과일가게? 기운이 점점 없어지는 거 같아서 덜컥 눈물이 났다. 씨발 죽으면 어떡하지. 묻어줘? 쓰레기 봉지에 넣나? 변기에 버려?


“미안한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좀 늦을 거 같아. 세 시간만 대타 뛰어주라. 다음에 급한 일 있을 때 내가 뛰어줄게.”


전화 너머에서 교대 알바가 ‘무슨 일인데?’ 물었다. 다음에 말한다고 대답하고 끊었다.


내가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고 해도 복숭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지켜보고라도 있어야 할 거 같았다. 죽으면 빨리 처리하고 괜찮은 기미가 있으면 출근해도 안심이고. 그런 생각이었다.


쾅쾅쾅


큰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깜박 졸았구나. 얼른 출근 준비를 하는데 쾅쾅쾅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시끄러워!”


옆집에서 소리 지를 때까지 우리 집인 줄 몰랐다. 당황해서 문을 여니 새파란 얼굴의 전 여자 친구가 서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상자를 열더니 시들한 복숭아들을 꿀꺽꿀꺽 삼켰다. 보드랍고 애잔한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무슨 짓이야! 하지 마!”


그 애는 듣지 않았다. 힘으로 떼 내려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복숭아 몇 마리를 삼킨 여자친구는 일어나 나를 노려보고 떠났다.

다음날 밤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상자 속의 복숭아들은 너무나 작고 보드랍고 흐믈대서 눈물이 펑펑 났다.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내가 말렸지만 전 여자 친구는 요지부동이었다.


“잘 기르지 않으면 먹어 버릴 거야.”


전 여자친구가 말했다. 시뻘건 과즙이 그득한 입속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너무 무섭고 끔찍하고 슬퍼서 눈물 콧물이 된 채로 애원했다.


“네가 낳은 아기잖아. 왜 이런 끔찍한 짓을 해.....”


그 애가 말했다.


“내가 낳았지. 너랑 만들었고.”


그 애는 입술에 묻은 빨간 과즙을 손에서 팔뚝까지 쓱 훔쳤다. 진득한 붉은색이 번진 피부가 더 새파래졌다.

“낳는 건 내가 했으니 기르는 건 네가 해야지. 낳는 데 내 목숨을 걸었으니, 기르는데 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야.”


나는 떨면서 남은 복숭아들에게 새로 뜯은 우유를 먹이고 똥오줌을 치우고 상자 속을 깨끗이 관리하고 다음날 밤을 기다렸다. 복숭아들이 먹어치워 지는 밤도 있었고 무사한 밤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복숭아들은 가끔씩만 전 여자 친구에게 먹히고 나머지는 쑥쑥 커졌다.

다부지던 내 팔뚝은 점점 말랐다. 복숭아를 먹이고 돌보느라 정작 나는 먹고 씻고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몸에서 쉰내가 나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자라 떡 지는데 복숭아들을 말끔히 돌보느라 앙상한 손만은 아주 깨끗했다.

마침내 다 자란 복숭아는 내 몸 보다도 컸다. 연한 색 털은 부드럽고 빽빽하고 뼈대는 나처럼 굵고 입속은 거대하고 이마선이 멋져졌다. 여자친구는 다 큰 복숭아가 무서웠는지 더 나타나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이미 복숭아를 먹일 것이 없었다. 배고픈 복숭아는 길게 하품하고,

마지막으로 나를 먹었다.


*작중 대화중 '너'라고 쓴 것은 오타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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