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HOT 무대 영상 녹화테이프를 선생님께 내밀었고 선생님은 수업시간을 비디오 감상으로 때우셨다. HOT 보단 젝스키스를 더 좋아했던 나는 맨 뒷자리 구석진 자리에 앉은 HOT 팬과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비디오 감상 대신 책을 읽었다.
그땐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단편소설을 도장 깨기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작가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한국 단편 문학을 쓴 작가들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소설로 접하며 상상한 작가의 모습과너무 다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역사도 야사가 더 재밌는 법.
이를 테면 염상섭의 별명이 횡보인데 술만 먹으며 취해서 옆으로 걸어 다녔다든가,백석이 사랑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방학이 찾아왔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긴긴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집 근처에 가까운 고등학교를 두고 멀리 도시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지원한 건내가 야망이 있는 학생이어서가 아니다. 그건 엄마의 소원이었다. 그 소원이 엄마 없는 사춘기 소녀를 버티게 했다.
그렇지만 수업료 고지서를 받아 들고서 이곳으로 진학한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담임선생님께 구구절절 어려운 형편을 변명하듯 늘어놓았고, 선생님께서 장학금을 신청해 주신 덕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시골 중학교에서공부 꽤나 한다고 해서 도시로 진학한 몇몇 아이들은 좀처럼 맥을 못 췄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배우며 생각했다. 청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 물결에 절어서 지쳐 돌아온 나비가 낯설지가 않다고.
동아리라도 가입하면 학교 생활이 좀 재미있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하고 독서동아리에 지원했다.
'책사랑'
정직하고 촌스러운(?) 이름 탓에 경쟁률은 낮았다. 덕분에 무난히 가입할 수 있었다.
선배들은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만나 독서토론을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함께 읽은 책은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처음엔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소설 속에 내 이름이 나와서 반가웠다. 그 아이도 나처럼 가난했다.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토론에 참여했지만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런 의미 었구나.. '하며 퍼즐을 맞춰갔다.
한 살 차이인데도 선배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났다. 내가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한다는 것이 뿌듯했고 순간순간 스스로가 멋져 보였다. 지적 허영심 같은 것이었을까? 나비는 그렇게 다시 바다를 꿈꾸기 시작했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은 책을 읽고 종종 독후감을 써오게 해서 대회에 보내기도 했다. 처음으로 독후감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반 아이들 앞에서 박수도 받고 선생님이 칭찬도 해주셨다. 담임 선생님께 '시골에서 온 애' ,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애'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랐다.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독후감을 쓰던 일이 유일한 기억이다. 중학교 친구들과는 아직까지 연락하거나 만나는데 고등학교 친구는 하나도 없다. 몇몇 기억나는 선배가 있는데 가끔 안부가 궁금하다.
동아리 활동이 아니었다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흑백으로 바래있었을지도 모른다. 잊고 지냈는데.. 읽고 쓰기는 그 시절에도 나를 지켜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