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100

by 슈퍼엄마

친구가 남자를 소개해줬다. 자기 남편이랑 같이 동업하는 남자라고 했다. 친한 친구의 소개니 믿을만 했다. 그렇게 일 년쯤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내게 꼬박꼬박 꽤 많은 생활비를 줬고 육아휴직 후 맘편하게 아이를 키웠다. 그래서 일이 잘되는 줄로만 알았다.

남편은 바깥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늘 어땠어?” 하고 물으면 바깥일을 집 안까지 끌고 들어오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 키우는 이야기나 주말 나들이 계획 등을 이야기했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어느날 친구가 나에게 요즘 남편이 생활비는 제때 주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 대답했다. 친구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것 같았다. 왜그러냐고 묻자 친구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자기는 몇달째 생활비를 못받고 있다고. 지금 하는 일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너는 어찌 그 많은 돈을 받고 있냐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크게 확장하던 일이 실패하면서 동업자와의 관계도 틀어졌다고 했다. 소송, 고소, 재판 등 무서운 단어들이 들렸다. 일이 이지경까지 왔음에도 남편은 내색하지 않았고 빚까지 얻어 생활비를 따박따박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빚이 얼마냐 물었더니 오히려 내게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물었다. 아이 돌잔치가 있기 이틀 전이었다. 빚쟁이는 아이의 돌잔치까지 기다렸다 정확히 그 다음날 처들어오는 아량을 베풀어줬다. 형편이 이런 줄 모르고 며칠 전부터 김치냉장고가 사고싶다했던 철없는 나를 탓했다가 나를 이렇게 만든 남편을 원망했다. 그땐 누구라도 붙잡고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종일 돈 생각뿐이었다.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복권을 살 생각은 안 했다. 안될 줄 알아서였을까? 돈 나올 구멍을 찾느라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월급쟁이 머릿속에서 나오는 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걸 떠올리게 되었다. 적어도 복권 당첨보다는 높은 1/100의 확률의 그것.

평소 즐겨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워낙 퀴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방송으로 볼 때 문제를 거의 맞추면서 '아. 내가 나갔으면 우승이네~'라고 허세를 종종 부리기도 했다. 허세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볼 기회이다. 기필코 우승을 해서 상금을 타 오리라! 호기롭게 내민 도전장을 방송국은 받아줬고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어딜 가냐는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티비에서 한 시간 남짓 방송하는 것과는 다르게 촬영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오랜시간 서있느라 다리가 많이 아팠다. 게스트 1인과 100명과의 대결! 게스트는 두 명 출연하므로 퀴즈를 맞출 기회는 두 판이 주어진다. 첫번째 판에서 최후의 10인까지 남았을 때는 '이러다 진짜 우승하는거 아니야?' 하며 김칫국을 이미 배불리 마셨다. 바로 그 다음 문제에서 떨어졌지만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아직 한 판이 더 남았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기회까지 허무하게 사라지고 나서는 나라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 하루종일 서서 문제를 푼 댓가는 문화상품권 4장이었다. 서울까지 가는 차비도 안나왔다.

새벽에 출발했는데 밤에 되어 대전역에 도착했다. 남편이 마중나와있었다.

"서울가서 돈은 벌어왔어?"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는 내게 남편은 돈은 내가 다시 벌면 되니 서울 안가도 돼~라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하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땐 그만큼 절박했다. 우리는 방송을 함께 봤다. 내 얼굴이 티비 화면에 세 번쯤 비쳤다. 실물보다 너무 뚱뚱하고 못생기게 나왔다며 속상해 하는 내게 남편은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도, 돌잔치 다음날 빚쟁이가 찾아왔을 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남편은 그날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새삼 '체구가 저렇게 작았나?' 싶었다고 한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비장하게 나갔지만 지고 돌아온 패잔병의 모습 같았으리라. 그러나 그 모습에 남편은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든 힘이 드는 날이면 아내가 1 100으로 싸우고 돌아온 그 날을 생각하겠다고 했다. 그날 남편은 일도, 돈도, 친구도 다 잃었지만 그 자리엔 가족이, 사랑이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남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제자는 추억들 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