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사 합격 후 첫 발령이 하필이면 2학기였다. 마치 3월 새학기에 교사와 학생이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일궈 놓은 밭에 중간에 투입된 일꾼 같았다.
선생님이 중간에 바뀌는 바람에 아이들도 혼란스러워했고 나 역시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업무를 파악하는 일도 벅차서 아이들에게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저..선생님, 부탁드릴게 있어요"
아이가 쭈볏대며 내 눈치를 살폈다.
"부탁? 부탁이 뭔데?"
"독서동아리 좀 맡아주시면 안될까요?"
아이의 표정이 제법 간절했다.
내가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아이는 행여 거절이 돌아올까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우리끼리 독서 동아리를 만들고 싶은데요..지도교사가 있어야 정식 동아리로 인정해준대요. 다른 선생님들은 다 시간이 안되신대요.."
아마도 수업과 업무로 바쁜데 따로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신규교사 입장에서도 귀찮은 일이긴 하겠지만 왠지 내가 꼭 해야할 일을 만난 기분이었다.
나 역시 학창시절 독서동아리 활동을 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아이들을 보자 예전에 내 모습이 떠올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학교에 부임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독서 동아리 지도교사가 되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고 감상평을 나누고 토론하고 싶은 주제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평소에는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철부지 중학생으로만 보였는데 동아리 활동에 임할 때는 꽤나 진지했다. 즐겁게 활동하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보일 때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무언가를 들고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 여기 나가고 싶어요!"
"응? 이게 뭐야?"
아이들의 손에는 '전국 독서토론 대회' 포스터가 들려있었다.
대회 준비 지도는 해본 적이 없어 많이 망설였지만 아이들도 나도 경험을 쌓는다 생각하고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방과 후뿐 아니라 주말까지 학교에 나와 책을 읽고 토론 준비와 연습을 했다.
아이들은 모이면 중학생답게 킥킥대며 웃고 떠들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다가도 토론이 시작되면 사뭇 진지해졌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대회 전날, 아이들과 서울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묵게 되었다. 혹시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으면 대회에 지장이 생길까봐 내가 여러번 당부했다.
"얘들아, 내일 컨디션 좋아야하니까 일찍 자야해"
하지만 누운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이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우리..잘 할 수있을까?"
한 아이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까만 허공에 대고 각자 한 마디씩 보탰다.
"준비 많이 했잖아! 잘 할 수 있을거야!"
"근데 잠이 너무 안와."
"나도 긴장되어서 그런지 잠을 못잘 것 같아"
그때껏 가만히 듣고 있던 반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한 번만 더 연습하고 잘까? 어차피 잠도 안오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 안자?"
놀란 내가 물었다.
"선생님, 저희 연습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자 나도 덩달아 힘이 났다. 그날 우리는 새벽 1시까지 연습을 이어갔고 다같이 들떠 힘든 줄도 몰랐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저 아이들의 눈빛을 저렇게 빛나게 하는 걸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말마다 모여서 준비해온 자료들을 꺼내들고 토론에 임하는 모습, 나의 피드백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메모하던 모습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책의 재미를 느낀 것은 물론 타인과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시절 함께 책을 읽으며 아이들은 한층 더 성장했다. 덕분에 초보교사였던 나도 여러모로 성장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매년 독서 동아리를 만들어 아이들을 지도한다. 처음에는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어려워하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갖고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나를 설레고 들뜨게 한다.
그때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지도교사를 거절했다면 내 교사 생활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귀찮고 할까말까 고민하는 일이 있으면 일단 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훨씬 많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내가 가르치는 것보다 배워가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배움의 기쁨과 가르침의 보람을 느끼고 싶어 오늘도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우리 이 책 함께 읽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