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어디야?”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간, 지연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이제 자려고 누웠어ㅡ 왜?”
답장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야, 지금 빨리 중문으로 좀 나와. 우리 아빠 온대.”
지연은 대학가 술집에 있었다. 유흥가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던 중이었다. 유난히 엄격하고 강압적인 아빠에겐 나를 만난다고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촉이 발동한 건지 지연의 아빠는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얼른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
어릴 적, 동생이 얻어맞고 밤탱이가 된 얼굴로 집에 들어왔을 때, 아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앞장서라”라고 말했다. 그 길로 가해자의 집에 들이닥쳐 고함을 치고 협박을 했다. 어른도 없이 그 집엔 아이들뿐이었는데, 그 소리에 겁에 질려 동생을 때린 아이와 그 누나가 울더라고 남동생에게 전해 들었다.
“걔 누나도 누나랑 동갑이야.”
“진짜? 누군데?.”
“지연이라고.. 알아?.”
안다. 그러나 이름과 얼굴만 알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괴로웠다. 혹시 친구들한테 말했을까? 쟤네 아빠가 우리 집 와서 깽판 쳤다고. 쟤네 아빠 이상하다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랐지? 우리 아빠가… 좀 성격이 불같으셔..”
그 아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 그런 거 익숙해.”
그 이후 우린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지연이와 나는 닮아 있었다. 화를 내면 불같이 돌변하는 아빠, 말썽꾸러기 동생을 두고 늘 장녀로 버텨야 했던 우리. 엄마조차 아빠의 폭발적인 성질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연이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아빠 얘기를 쏟아냈다. 불평과 하소연을 서로에게 토해내며, 그래도 살아남은 장녀끼리 위로했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를것만 같은 뜨거운 응어리를 서로가 지그시 눌러주며 그 시기를 버텼다.
지연의 아빠가 도착하기 직전 다행히 우리가 먼저 만나 말을 맞췄다. 그날 지연의 아빠는 우릴 보고 거의 검거 직전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용의자를 보듯 했다.
“너 쓸데없는 짓하다 한번 걸리기만 해 봐.”
걱정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아빠는 돌아가셨다. 그 후로 지연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을 리 없지만 다행히 걸리진 않은 것 같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서로의 방패가 되어줬다.
세월은 흘렀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아빠와 거리를 두었다. 연락을 먼저 하지 않았고, 아빠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세월이 흘러 고집스러운 간섭도 누그러지고 불같은 기운도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그 불기운에 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런데 지연은 달랐다.
지연의 엄마는 아빠의 성질을 참아내지 못해 집을 나가셨고 지연은 그런 아빠를 살뜰히 챙겼다. 혼자 있는 아빠의 끼니를 챙기고 말을 걸어주었다.
며칠 전, 지연은 아빠를 요양원에 모셨다고 했다.
“많이 안 좋으셔?”
“아빠 사진 보여줄까?”
180 가까이 되는 큰 키에 덩치도 산만했던, 눈이 크고 부리부리해서 그 눈을 마주치는 것도 무서웠던 지연의 아빠가 사진 속에 힘없이 누워계셨다. 우린 그날 새벽까지 아빠 이야기를 했다. 걱정과 원망,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말들이었다.
그리고 어제, 지연의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전화를 붙들고 있던 지연의 목소리는 울음과 차분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오래도록 지연을 짓누르던 그림자가 비로소 사라진 듯했지만, 그 공허는 더 깊게 파고든 것 같았다.
“뭐 좀 먹었어? 괜찮아?.”
“저 아저씨 울 아빠랑 친한 아저씨거든. 근데 보자 마자 아빠를 찾았어. 아빠~ 종우네 아저씨 오셨어! 하면서 아빠를 찾았어.. 아빠가 없는데 자꾸 아빠한테 말을 거네..”
그렇게 말하며 지연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지금, 지연의 아빠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여전히 놓지 못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였다.